▲ 봉수대에서
아! 봉수대다. 올라서니 참으로 시원하였다. 아주 낮은 봉수대 푯말이 서있고 아담한 평지의 둘레에는 구절초와 쑥부쟁이들이 가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원래 이곳이 방장산의 최고봉이었지만 6.25때 폭격으로 주저앉는 바람에 정상의 자리를 내주었다고 한다. 그럼 어떠리~~ 정상이 아니어도 지금 이곳은 충분히 정상의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햇살과 바람에 곰삭은 세월의 흔적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표지목 푯말 옆에 내 배낭을 세워두고 인증샷을 찍었다. 누구 찍어 줄 수 없으니 내 배낭으로 인증샷을 하고 싶어 그리 했는데 썩 괜찮은 생각처럼 여겨진다.
평평한 바위위에 앉아 사과 한 쪽과 커피를 천천히 마신다. 드높은 하늘과 거칠 것 없는 구름들의 자유분방함, 그리고 알맞게 불어주는 바람. 그늘 하나 없는 하늘 아래 높은 곳이지만 전혀 따갑지 않았다. 바람도 아주 부드러웠다. 등 뒤로는 수풀이 막아주고 앞으로는 확 트인 풍경이 있으니 세상 제일 좋은 자리가 이곳이고, 지금 그 좋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 내가 아닐까. 지금 온 산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 심심하거나 외롭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전혀 외롭거나 심심하지 않다. 오히려 내 안을 깨끗하게 내 보일 수 있음에, 내 마음이 깨끗이 씻겨 지는 홀가분함이 가득하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저 아래의 모든 것들은 단 하나에 속하며, 단 하나일 뿐인데 저 아래 사는 사람들은 작은 땅 한줌에도 집 한 채에도 네 것, 내 것을 따지면 살아가고 있음이다.
이 높은 곳에서 자라는 구절초들이 모습이 더욱 청순해 보인다. 문득 나옹선사의 시가 떠오른다.
청산은 나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보고 티 없이 살라한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라 한다.
아무리 오래 앉아 있어도 따갑지 않은 햇살, 그리고 바람이 얼마나 좋은지 일어나기 싫다. 저 멀리 방장산 정상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보인다. 아마도 저 사람들은 나와는 반대방향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일 것이다. 내 저기 오르면 저 사람들을 만날 테니 오늘 이 산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다. 아쉬움을 접고 일어나 배낭을 바라보니 배낭도 나와 함께 가기 싫은가 보다. 어느새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편안하게 있었다. 가야 한단다. 다그치며 배낭을 둘러메고 나서니 마치 양지 바른 곳을 놓아두고 차가운 그늘 속으로 들어가는 듯 아쉬움이 진하게 밀려온다. 그냥 그렇게 햇살아래 무념무상으로 놀고 있는 구절초들의 모습을 찍으며 조금 더 눌러 있다가 정상을 향해 걸었다.
나에게는 오늘의 최고봉은 봉수대였다. 오늘 산행의 묘미를 마음껏 즐긴 봉수대에서의 시간은 나머지의 시간들을 여유롭게 걸으라는 하늘의 마음을 전달 받은 순간이었다. 적적하고 고요한 시간을 만나면 내 안을 관조할 수 있다. 나를 바라보며 내 오늘 산이 내어준 길을 따라 걷고 있듯, 하늘의 저 구름에도 제 길이 있을 것이다. 제 길을 따라 움직이는 저 오묘한 진리 덩어리들을 바라보며 걷는 다는 것은 하나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산이 만들 어 준 가장 정직한 길을 오늘 내 여한 없이 걸으며 가장 정직한 길에 고해성사를 하는 시간이었다.
드디어 방장산 정상을 올랐다. 하늘의 빛이 참으로 곱다. 곳곳의 너른 바위위에 사람들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에서 비켜나서 오롯한 바위 위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며 익어가는 가을을 마음껏 누려본다. 이제 내려가야 하는 길은 4.7km라고 안내판이 알려준다. 앞으로도 약 2 ~ 3시간을 걸어야 한다. 아마도 오늘의 산행은 여기까지가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내 앞에 펼쳐지는 것들에 마음 나누며 천천히 내려가야겠다. 정상을 뒤로하고 막 굽이도는 곳에서 만난 조망대~ 문득 그곳에서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청산에 살리라 라는 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흥얼거리듯 불렀다.
청산에 살리라 ♬
김연준 작사
김연준 작곡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리라
이 봄도 산허리에 초록빛 물 들었네
세상 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서 살리라
길고 긴 세월동안 온갖 세상 변하였어도
청산은 의구하니 청산에 살리라
<후렴>
이 봄도 산허리에 초록빛 물 들었네
세상 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서 살리라
길고 긴 세월동안 온갖 세상 변하였어도
청산은 의구하니 청산에 살리라
▲ 내 배낭으로 인증샷
▲ 솔새
▲ 평평한 지대를 이용해 헬기장으로 활용하는 듯
▲ 하늘을 향하는 몸짓들이 마치 가을을 부르는 손짓같다.
▲ 구절초들이 제 각각 치장하고 나들이 나섰다.
▲ 사데풀
▲ 금방이라도 저 아래를 향해 날아갈 듯..
▲ 자꾸만 내 발길을 붙드는 구절초
▲ 정상으로 향하던 중, 뒤돌아 봉수대를 바라보며...
▲ 내가 지나온 봉우리들~~
▲ 나는 양고살재로 내려가야 한다
◆ 조망대
아무도 없는 조망대에서
나 혼자만의 무대삼아 "청산에서 살리라" 를 조용히 불렀다.
관중은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꽃
나를 지휘하는 지휘자도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꽃
▲ 이 동영상은 웹에서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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