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유일한 취미라며 산을 찾는 일이다. 혼자 조용히 동네 뒷산을 오르는 습성이 어쩌다 한 번씩 큰 산으로 이어지더니, 얼떨결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 22곳을 모두 다녀오게 되었다. 꼭 국립공원을 다니자는 계획을 가지고 한 일은 절대 아니다. 어떻게 그렇게 된 것 뿐인데 막상 마치고 나니 뿌듯함으로 이어졌다. 다 끝냈다고 산에 다니는 걸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욕심일까? 이제 무엇 하나에도 계획을 세워 나가자는 생각이 들어 궁리하던 차, 호남 명산을 선정해 놓은 책자를 만났다.
책에는 26곳을 선정해 놓았고 그 중에는 호남권의 국립공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여 내가 가본 곳과 가보지 못한 곳을 구분해 보니 선정된 26곳 중에는 가보지 못한 곳이 더 많았다. 이제 목표가 생겼다. 앞으로 산행을 할 시간이 나면 호남의 명산을 찾아 오르기로 하였다. 국립공원처럼 1,000m 넘는 산들은 드물었으니 마음의 부담이 적었다. 그렇게 하여 다녀온 곳이 추월산과 조계산이었고 세 번째로 지난 토요일(20일)에 고창의 방장산을 올랐다.
산행 들머리로 정한 장성갈재를 찾아가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들머리에 도착하니 오전 9시 8분이었다. 토요일이었지만 장성갈재의 통일공원에는 딱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을 뿐이었다. 국립공원은 일단 도착을 하면 많은 등산객들이 있어 안심이 되곤 했는데, 호남의 명산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도 적을뿐더러 이정표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니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했다.
오늘도 남편은 나와 반대로 날머리에서 조금 오를 계획이다. 그렇게도 산을 좋아하고 거침없던 사람이었는데 몇 년 전, 작은 수술 후 높이 오르는 것을 엄청 힘들어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를 위해 늘 같이 나와 산의 맛만 보고 몇 시간이고 나를 기다려 주는 수고를 싫다하지 않으니 나는 열심히, 충실히 산을 오르곤 한다.
오늘 역시 산길에 오직 나 한 사람뿐이다. 여기에 오기 전 인터넷으로 등산로를 확인하고 지나는 길목의 표시물들을 익혀 두긴 했지만 자칫하면 등산로 아닌 길로 빠질 수 있으니 참으로 조심스럽다. 갈재에서 쓰리봉(734m)까지 오르는 일이 처음 목표점이다. 산길은 부드러운 육산이었지만 쓰리봉까지 단 한 번도 내리막이 없는 계속된 오르막이었다. 설악산의 된비알 코스인 오색에서 대청봉 오르는 길과 거의 비슷하였다.
알맞게 부드러운 가을 햇살은 산등성 깊숙이 파고들면서 온갖 식물들의 자람을 부추기고 있었다. 그에 등산로는 온갖 잡풀들이 우거져있으니 한 여름에도 짧은 소매와 반바지 차림은 절대 아니 될 것이다. 그 잡풀 틈에서 여한 없이 피고 지는 꽃들이 참으로 애처롭다. 지금 이곳 방장산에는 물봉선, 여뀌, 까치고들빼기가 지천이다. 하나 둘씩, 아니면 무리지어 피어 있기도 하고 어느 곳은 아예 꽃밭을 이루며 장관을 펼치고 있었다. 이리저리 해찰을 하며 하늘과 바람과 구름을 벗 삼아 기분 좋게 걷고 있는데 무언가가 바사삭하면서 재빠르게 지나간다. 어머나! 나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뱀이었다. 내 몸에 소름이 쫙 돋는다.
그 순간 다시 내려갈까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쩔까 하면서도 지금 무릎까지 올라오는 풀숲을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인 생각으로 전진을 하고 있었다. 이제 눈을 위로 향하는 것이 아닌 아래를 향하며 걷고 있으니 자꾸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쓰리봉까지는 한 시간정도 걸린다 했는데 한 시간보다 10여분이 더 지나 있는데 아직도 도착 전이다.
그 순간 내가 길을 잘못 들었나? 내 걸음으로 40분이면 도착하리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는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 길에 잘 못 들었다면 다시 내려가야 하는데, 그 길이 더 헷갈리면 어쩌지? 하는 마음으로 나는 큰 고비 한 잎씩을 따서 오솔길에 가로로 놓으면서 걸었다. 길 따라 들어선 나그네가 잘못 들어 다시 내려가야 하는 경우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다.
내가 그동안 잘 살아왔다면 행여 은혜라도 받을까? 조심스런 마음으로 숲에 긴 눈길을 주지 못하고 곁눈질로 풍경을 음미하며 뱀이 아닌 또 다른 새로움과 경이로움을 만나려 억지를 쓰는데 새 한 마리가 적막을 깨트린다. 아, 새가 안심하라고 신호를 보내주는 것이다. 풀숲을 벗어나 있었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노라니 훅 끼쳐오는 진한 풀냄새가 좋다.
절대 서두르지 않겠노라고 거듭 다짐을 하니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느낌이다. 요즈음처럼 신속하고 빠름을 우선으로 하는 우리들이지만 숲속은 느림을 지향케 한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의 빠름은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추측과 자만심으로 확인된 빠름으로 잘못된 방향을 잡았다면 위기에 직면하고 마는 법, 지금 나는 눈과 마음을 하나로 일치시키며 느리게 나아가야 하는 시간이다.
초행길인데다 사람 하나 없는 산길은 절대로 호락호락 하지 않은 길인 것이다. 나만의 표시를 하며 걷는데 우측으로 우뚝 바위가 나타난다. 쓰리봉인가? 지금까지 걸어온 등산로에서 우측으로 비켜난 곳인데… 한참을 망설이다가 지금의 내 위치에 대한 표시를 해 놓고 바위 곁으로 갔다. 올라서서 한 바퀴를 돌았지만 쓰리봉이란 표시석은 아무데도 없었다. 샛노란 미역취만이 맑은 하늘 아래에서 살짝 바람에 흔들리며 피어 있었다.
쓰리봉이 아님을 확인하고 다시 내려와 원래의 자리에 돌아오니 산길인 듯 아니듯 싶은 길가에 고흥유씨묘라는 비가 세워져 있다. 아! 그렇다면 나는 정상적인 루트를 타고 온 것이 틀림없다. 쾌재를 불렀으니… 이정표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곳은 이렇게 작은 무언가가 지표가 될 수도 있음에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이 묘의 후손들은 추석에도 벌초를 하지 않았는지 무덤의 형태는 잡풀에 가리어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이토록 깊은 곳의 묘에 누군들 쉽게 오를 수 있을까. 후손들을 대신해 오늘 이렇게 나를 인도해준 무명씨님께 감사의 마음을 드리고 계속 나아갔다.
▲ 장성갈재 산행 들머리
▲ 들머리 맞은편 통일공원에서
▲ 차단막을 들어서자 만나는 안내표시.
쓰리봉 방향으로 전진~~
▲ 까실쑥부쟁이
▲ 긴뚝갈
▲ 깊은 산 속의 돌담은 누가 언제 쌓은 것일까
▲ 어느새 씨앗을 맺고있는 물봉선
물봉선이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는 방장산이었다.
▲ 쓰리봉인 줄 알고 올라 선 바위에서 바라본 풍경
▲ 고흥유씨묘
행여 잘못 들어선 길인가를 염려했는데 이 비석이 나를 안심케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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