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안개 기운이 드세다. 해 뜨는 시간이 지나고 이미 하늘을 차지하고 있어야 할 해는 좀처럼 제 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비가 내린다는 예보는 아니었기에 언젠가는 안개가 걷힐 거라는 기대감으로 계속 달렸다. 2시간여를 달려 구례에 닿으니 안개의 농도는 많이 옅어지고 있었다.
노고단의 정상을 찾아 나선 마음, 여간해서 잡을 수 없는 어려운 여건이기에 이왕이면 정상에서 느낄 수 있는 최대의 조건을 누리고 싶다. 정상에서 쫙 펼쳐지는 능선의 편안함과 그곳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식물들, 그리고 확 트인 조망을 바라보며 마음껏 마음을 열어보는 일들은 산의 정상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일 것이다. 노고단에는 오후 3시 30분까지 입장이 가능하다 하니 산 아래에서 조금 놀다 안개가 걷힌 후 올라도 시간상 별 무리가 없을 듯싶다. 하여 쌍계사 계곡을 타고 오르는 길을 따라 올랐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칠불사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쌍계사 계곡이라고 할까? 끝없이 이어지는 계곡의 청량함이 참으로 좋았다. 어쩜 저렇게도 맑음을 지니고 있을까. 크고 작은 바위들을 만나는 물길은 그대로 굽이쳐 흐르며 쉼 없이 재잘거린다. 물은 소리가 없는데 다만 바위를 만나 엄살을 부리는 것 같다. 저 소리는 물소리일까 바위소리일까. 서로 어울리며 빚어내는 모습들 그대로 풍경으로 각인되어 있다.
저 풍경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펜션을 짓고, 예쁜 찻집을 운영하고, 등산객들의 허기짐을 달래주는 음식점들… 이 모두는 지금 지리산이 내어주는 넉넉함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으니 과연 지리산은 얼마만큼의 거대함을 품고 있는 것일까. 끊임없이 내어주고 또 내어주는 그 무엇들을 저 물줄기들은 알고 있을까? 날마다 저만큼의 수량을 흘러 보내는 지리산의 샘물은 정말 음전하게 흐르는 저 섬진강의 물줄기를 이루고 있으니!
우람하면서도 한없는 정겨움을 안겨주는 계곡을 한참을 따라 오르던 길은 어느 순간 급격하게 벼랑길을 차고 오른다. 고도가 얼마 쯤 일까. 귀가 멍해져오니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켜 귀를 뚫었다. 아, 높은 곳을 오르다 침을 삼키다니… 난 결코 높은 곳을 욕심내지 않을 뿐인데 내 마음 깊숙이 숨겨진 욕망이 있었나 보다. 절에 닿기 전 얼른 그 욕망을 내려야겠다. 그래야 부처님을 바라볼 수 있을 테니… 브레이크를 계속 밟아서인지 차바퀴에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날 즈음 칠불사의 일주문을 만났다.
어느 사찰이든 으레 그렇듯 칠불사 역시 참 좋은 풍경 속에 고즈넉한 단정함이 물씬하니 나도 모르게 조심스러운 마음이 된다.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이란 칭호의 칠불사(七佛寺)는 지리산에서 두번째로 높은 반야봉(般若峰)의 거대한 혈맥이 남쪽으로 용틀임 하며 뻗어 내린 곳, 해발 830m에 자리 잡고 있다.
험준한 산속 깊숙하게 자리 잡은 칠불사는 20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으며, 베일에 가려진 가락국 왕조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의미가 큰 사찰이다. 아자방(亞字房) 온돌,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성불한 사찰, 서산대사 등 수많은 선사를 배출한 동방제일의 선원이란 등등의 칭호로 잘 알려진 지리산의 사찰이다.
▲ 가림막? 무엇을 가리고 있을까?
칠불사의 아자방은 칠불사 창건 설화 못지않게 오랜 세월을 보내오면서 수많은 설화를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번 불을 지피면 겨우내(100일 동안) 훈훈한 온기가 가시지 않는다는 이 방은 100명이 좌선할 수 있으며 신라 효공왕 때 김해에서 온 어느 선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다. 100년마다 한 번씩 아궁이를 막고 물로써 청소를 하면 아무런 부작용이 없이 불이 잘 지펴져 방 주위의 높은 곳부터 따뜻해져 그 온기가 오래도록 유지된다. 이 아자방에서 수도를 통해 득도한 고승은 수없이 많다. 아자방은 지방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82년에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 쥐꼬리망초
▲ 털별꽃아재비
▲ 꽃무릇(석산, 상사화)
일곱 왕자의 성불이 깃들인 긴 역사의 칠불사는 1800년의 화재로 보광전 약사전 신선당 벽안당 미타전 칠불상각 보설루 요사 등 10여 동이 불타버렸으나 다시 복구됐다. 그 후 6.25 전쟁 당시 빨치산과 국군토벌대와의 교전이 치열한 와중에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의혹을 사 다시 불타는 아픔을 겪고 78년부터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락국의 신비와 우리나라의 불교문화 전래 과정과, 천년 온돌 아자방과 아자방에서 득도한 수많은 고승들의 발자취, 그리고 전쟁의 아픔은 물론 우리 선조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지리산 칠불사. 높고 깊은 곳에서 우리민족의 역사와 애환을 간직한 채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칠불사를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계곡은 또다시 나를 따라 나서며 재잘거린다. 저 물길을 따라가면 내 잃어버린, 알 수 없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 . 하늘의 안개는 거의 걷힌듯하니 노고단을 향하여 열심히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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