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이 밝아오기 전의 나팔꽃
늘 똑같은 일상의 반복에서 벗어나 또 다른 삶을 기웃거리는 일은 나의 활력소를 충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지리산을 다녀온 후, 3일 동안 뒷산을 오르지 못했다. 다녀온 다음날은 일찍 일어나지 못했고 나머지 이틀은 많은 비 때문이었다. 며칠 오르지 못한 나의 궁금함을 알기라도 하듯 오늘 새벽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새벽길이 제법 어둑해졌다. 자칫 사물의 분간이 어려운 시절이 되었을까. 하지만 나는 그 자리 그곳에서 자라는 모든 것들의 모습들을 기억하고 있기에 반갑다며 살짝 스치는 손길로 인사를 나누었다. 참으로 안온한 느낌이다.
그 무엇이 이토록 나를 편안케 하는 것일까. 새벽 뒷산 산책은 나만의 의식이다.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연을 만나며 나를 찾아보는 시간이다. 날마다 반복하는 행위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은 의식인 것이다. 의식은 경건함이 수반되기에 나를 낮추는, 무언가에 기댈 수 있음에서 빚어지는 편안함일 것이다.
시나브로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유난히 뚜렷한 모습의 나팔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온다. 어쩜 며칠 전까지도 꽃을 피우지 않았는데… 이른 아침에만 활짝 핀 모습을 보여주는 꽃, 하여 허무한 사랑이란 꽃말을 가지고 있는 나팔꽃이 참으로 예쁘다. 연꽃보다 한 시간 뒤져서, 용담(龍膽)보다는 한 시간을 앞서서 오전 5시경에 피어난다하니 나는 지금 막 꽃을 피운 모습을 만난 것이다. 아침 일찍 한 때만 피기 때문에 이리도 발랄한 모습일까. 옆의 가느다란 풀잎에 맺힌 이슬이 있어 더욱 청순하다. 쪼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폰에 담노라니 말 할 수없는 정겨움이 차오른다.
높은 산에서 자라는 식물이나 이처럼 낮은 곳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모습은 너나할 것 없이 제 고유의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 그에 이름을 한 번씩 불러주는 일,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 일 것이다. 그러노라면 그들은 몸 전체로 내 부름을 듣고, 몸 전체로 꼭 답을 해 준다. 나로 하여금 자신의 숨은 매력까지도 볼 수 있도록 입을 달싹거리는 것만 같다. 그냥 지나 칠 수 없는 몸짓들이다. 그들이 전하는 내용을 제대로 들으려면, 그들의 세계를 온전히 만나려면 나는 내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오늘의 나팔꽃은 그냥 혼자 아무렇게 피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팔꽃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부르는 힘을 어렴풋이 알았다고 믿기에 이처럼 글로 풀어내는 힘으로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보고 느끼고 글로 풀어내는 일, 일찍이 공자님이 하신 말씀이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시경>을 읽으라고 한다. 조수초목지명(鳥獸草木之名), 즉 새와 동물, 나무와 풀의 이름을 많이 알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연을 이루고 있는 존재들을 하나씩 세세함으로 바라보며 교감을 나누는 감명은 곧 詩로, 문장으로 되살아나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 글뿐인가. 자연은 자신을 선택해 최고의 나눔을 행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우리의 대통령은 이번에 방한한 교황에게 화목문(花木紋) 자수 보자기를 선물했다고 한다. 우리 고유의 직물인 백색명주에 약 30가지 색깔의 실로 6개월간에 걸쳐 꽃과 나무, 새 등을 수놓은 보자기다. 이 모두 자연에서 얻은 영감이고 재료가 아닌가. 자연을 수놓은 나무, 꽃, 풀들은 이토록 우리에게 깊은 뜻을 안겨준다. 그들의 모습을 따라하고 싶고, 그들의 빛을 취하고 싶다. 언젠가 가을, 뒷산의 실새풀의 멋진 자태를 바라보다 그만 그들의 모습을 수놓고 싶어 흉내를 낸 적이 있다. 비록 솜씨는 없을지언정 수를 놓는 그 순간만큼은 참으로 마음이 여려지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문학에서의 자연은 또 어떠한가. 어쩌면 하나의 글 속에 팔, 구십 프로를 차지하는 존재가 아닐까. 글을 시작하기 전, 혹은 중요한 대목에 자연을 끌어들이며 그 당시의 상황이나 모습, 또 주인공들의 마음까지도 아울러 읽어달라고 작가는 주문한다.
아픔도 슬픔도 기쁨의 순간에도 늘 함께하는 자연, 언제나 꾸밈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순수함을 잃지 않기에 언제나 최상의 선택을 받고 있다. 나 혼자만의 의식을 치루는 시간 속에 자연이 늘 함께하는 축복을 깨닫게 해 준 고운 나팔꽃 한 송이를 내 마음에 수 놓아본 오늘이다.
▲ 화목문 보자기
▲ 언젠가 실새풀을 수놓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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