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배운 도둑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요즈음의 내가 그렇다. 시간을 딱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내 인내심을 시험하며 뒷산을 오르기 시작한 이래 어언 16년 차다. 한 시간 다녀와서 아침식사와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까닭에 한 눈 팔 수 없이 오직 정해진 길을 정해진 시간 내에 다녀오는 것으로 길들여졌다.
오가며 만나는 나무들과 인사하기 바쁘고 철 따라 피는 꽃들에 무한한 감성을 실어보기도 한다. 새벽달에, 한 겨울 팽팽한 하늘의 초롱초롱한 별, 계절 따라 내리는 비, 눈, 등 언제나 새로움으로 가득한 곳이기에 전혀 지루함 없이 오직 청명함으로 가득한 마음을 안고 다녔다. 때론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함으로 나만의 좋은 시간을 누린다는 뿌듯함도 숨길 수 없다.
이 오솔길에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시기가 있으니 바로 봄과 가을이다. 봄에는 고사리를 꺾기위한 사람들이고, 요즈음처럼 가을이 시작되면 밤을 줍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늘 다니는 길, 늘 시간을 내며 의식을 치루 듯 다니는 산이기에 누구보다도 내 발자국이 제일 많지 않을까 여겨지지만 난 여태 고사리를 꺾거나 밤을 주워본 적이 없다. 아니 내 눈에는 고사리나 떨어진 밤이 보이질 않았다. 어쩌다 막 올라오는 고사리를 만나면 사진 찍기에 몰두했고, 떨어진 밤송이는 빈 껍질이라 여기며 별로 주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추석 며칠 전 날, 밤송이와 알밤 몇 알이 나란히 떨어져 있는 걸 보았고 사진을 찍었다. 떨어져 있던 밤을 무심코 주워들고 내려오노라니 괜히 그냥 내가 부자가 된 듯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날 부터였다. 밤이 떨어져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오솔길을 걷다가도 무심코 밤나무 아래로 걸어 들어가는 거였다. 하루는 밤을 줍고 싶은데 시간은 정해져 있는지라 평소 다니던 반환점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서 되돌아 와 밤나무 아래에서 허리를 구부리며 걷고 있는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던지… 등산복 호주머니에 빵빵하게 줍고 나면 얼추 시간이 맞아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였다. 한번에 2~30개 정도는 너끈히 주울 수 있었다.
그렇게 주운 밤을 곱게 깎았다. 깎은 밤을 추석 차례 상에 올려놓자고 형님께 말씀드리니 웃으면서 올려 주셨다. 내가 생각해도 참 기특하였다. 욕심은 욕심을 낳는다 했다. 추석 다음날 새벽은 달이 마치 보름날 달처럼 크고 환했다. 달을 일별하고 등지고 서니 오솔길에 내 키의 3배 정도는 길게 그림자를 내려주며 나를 불러 세웠지만 나는 밤 주울 생각에 걸음을 빨리 했다. 어쩌면 저 달은 나한테 서운타 할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무언가를 내 것으로 한다는 욕심이 달만큼이나 부풀었으니 달의 마음을 읽을 수도 없었다. 이왕 나왔으니 반환점까지 다녀와서 줍자는 생각으로 날다람쥐만큼이나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렇게 되돌아와 늘 다니던 밤나무 밑으로 가니 어쩌나! 나보다 먼저 한 사람이 밤을 줍고 있었다.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었다. 그이는 커다란 봉투까지 들고 있었다. 나는 기껏해야 5분여를 밤을 줍지만 그이는 이제부터 시작하여 온 산의 밤나무를 다 찾아다닐 것이다. 이즈음이 되면 그렇게 배낭까지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문득 달님이 생각난다. 자기의 마음을 나 몰라라 한 나에게 밤 줍는 기회를 빼앗아 버렸을까. 허망한 마음을 안고 뒤돌아서는 나에게 그이는 밤을 몇 개 쥐어준다. 괜찮다고 했지만 몇 개 나누면 좋겠다 한다. 받아들고 보니 5알 이었다.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오는 동안 내 마음이 참 부끄러웠다. 이 시간에는 나만이 밤을 주울 거라는 나의 마음이었는데 그이는 헛걸음을 하는 나에게 자신의 밤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우리가 먹는 밤은 밤나무의 씨앗이다. 밤나무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껍질을 벗겨낼 수 없는 날카로운 가시를 세워 씨앗을 보호한다. 생존경쟁의 안간힘이다. 그렇지만 익을 대로 익은 밤은 스스로 가시를 벌리면서 밤알을 떨어트리는 것이다. 밤나무는 씨앗을 퍼트리는 행위인데 우리 사람들은 거저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욕심을 내세워 남보다 먼저, 많이 취하고자 했던 내 마음을 달님에게 들켰으니 참 부끄럽다. 그럼에도 요즈음의 발걸음은 자꾸만 밤나무 밑을 향해가고 있으니… 공짜 좋아하는 내 안의 본능이 날 새는 줄 모르고 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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