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길은 평소와 다르게 어두웠다. 시간을 잘못 보았나? 폰 시계를 확인해 보았지만 틀림없는 그 시간이다.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비가 오려나? 집으로 되돌아갈까 말까를 몇 번 망설인 끝에 ‘비 내리면 맞지 뭐’ 작정하며 내친걸음에 힘을 주었다. 기어이 한 두 방울 씩 떨어지는 빗방울에 조급함을 가졌지만, 혼신을 다해 바람과 맞서는 나무들의 모습을 보니 내 편인 듯 안심이 된다.
편 가르기에서 바람이 졌나 보다. 조금은 온순해진 바람이 더 없이 상쾌하다. 빗방울도 더 이상 제 자리가 없음을 알고 물러선다. 온순해진 바람결에 뒤척이는 나뭇잎들의 스치는 소리는 자연이 읽어주는 경전이다. 경전으로 마음을 다스린 바람은 종일 부드럽게 나를 스치며 계절의 페이지를 넘겨주고 있었다.
그들의 부드러운 유혹은 나를 밖으로 끌어낸다. 업무상 은행에 다녀오자며 그냥 걸었다. 얇은 천의 스커트와 블라우스가 바람에 펄럭이니 내 발걸음도 가볍다. 달력상의 봄도 이제 사흘 남았다. 봄의 끝자락을 붙잡고 싶지만 성급한 여름은 이미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여름은 미리 찾아오기가 미안한지 갖가지 잘 익은 제철 식품들을 앞세우고 있다. 한 마트에서는 인도(人道)까지 계절 식품을 쌓아놓고 호객한다.
엊그제 매화꽃이 피었다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그들은 어느새 열매를 키워냈다. 초록 매실은 초록 망에 고만고만한 무게를 담아 쌓아 있다. 동글동글한 양파는 붉은색 망에 크기대로 담아 있다. 마늘은 언제 저렇게 알뿌리를 키웠을까. 50개씩 묶여진 마늘 다발을 가득 실은 트럭도 길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보기만 하여도 풍성해지는 마음이니 자꾸만 기웃거리느라 해찰이 심하다.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저들의 싱싱함을 놓치고 만다. 매실은 진즉에 지인을 통해 20kg을 주문 해 놓았다. 양파는 한 달 전쯤 200알 정도를 다듬어 양파피클을 만들었다. 마늘은 엊그제 2접(200개)을 구입해 놓고 조금씩 시간을 틈타 껍질을 벗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길가에 놓인 마늘 다발이 어찌나 튼실해 보이는지 기어이 한 다발을 더 사고 말았다.
마늘 껍질 벗기는 일이 오늘로 3일 째, 손끝이 얼얼하지만 참 재미난 일이다. 갑옷 같은 껍질을 벗긴 후, 안의 얇은 필름막까지 벗겨내면 하얗고 통통한 알이 나온다. 참 탐스럽다. 이토록 탐스럽게 자라기 위해 얼마만큼의 담금질을 했을까. 비록 인간에게 먹힐 존재지만, 먹히는 그 자체가 마늘이 지닌 최고의 가치일 것이다. 그 가치에 도달하기 위한 인고처럼 어려운 일이 있을까.
간혹 끝이 조금씩 상한 마늘이 보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어쩌면 불쑥불쑥 인고의 한 순간을 참아내지 못한 마음이 표시인지도 모른다. 살아가노라면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보다도 하지 말아야 하는 때가 더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 말아야 함을 참아내는 인고의 시간을 잘 견뎌내어 마음의 상함이 없는 튼실함으로 살아야 할 것이라고 통통하니 잘생긴 마늘이 알려준다. 마늘 향에 실려 온 초여름이 저만치서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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