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근원(近園) 김용준님의 근원수필을 읽고 있다. 일전에 다른 책을 읽는 중에 이 책을 추천하는 내용을 보고 찾아 구입하였던 것이다. 1930년에서 50년 사이에 기록한 수필집이다. 고전적인 문구가 많이 섞여 있기도 하지만 내용의 깊이에 빠져들다 보니 글 한 편 한 편을 세심함으로 읽고 있다.
그 중 내 마음을 강하게 끌어들인 내용이 있었으니 ‘강희자전과 감투’ 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강희자전은 오늘날 한자자전의 효시가 되고 있는 책인데 당시에 저자가 소장하고 있던 책이었나 보다. 그 시절은 하 어려운 생활이었을까. 가지고 있는 책을 팔아 식량 구하는 일에 어색함이 없었던 듯, 작가는 강희자전과 또 한 권의 책을 들고 책방을 찾아간다.
당시 쌀 한 말이 800원 하였는데 적어도 쌀 한 주발과 고깃근을 살 수 있을 거란 예상을 하였는데 책방 주인은 100원만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후하게 쳐 주었다는 주인장의 말에 아무 말 못하고 이를 꽉 깨물며 받아놓고, 몇 날 며칠을 그 책방에 들려 내가 맡긴 책이 팔려 나갔나를 확인 해 보면서 결국 한 달 만에 웃돈을 주고 다시 사 왔다는 이야기다. 책방 주인장은 아마도 귀한 책이어서 5, 6백 원은 받고 팔 속셈이었을 거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었다.
가난함을 어쩌지 못하고 아끼던 책을 팔아놓고 행여 그 책이 다른 사람에게 팔릴까봐 애태우는 심정을 대하노라니 그만 내 마음이 찡해진다. 이런 이야기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조선 후기의 학자들에게서도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책에 미친 사람이라 불렸던 이덕무도, 열하일기로 유명한 박지원도, 책을 팔아 끼니를 이었다고 한다. 책을 팔아야만 했던 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럼에도 친구의 가난함을 염려하는 우정으로, 때론 집 식구들의 배고픔을 면제해 주기위한 책임감으로 책을 팔면서도 어쩌면 그런 구차함을 마다않고 받아주는 책방이 있어 위안이 되었을 것 같다.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많이 나아진 형편이었지만 나에게도 헌 교과서나 참고서를 사야만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역시 풍족하지 못한 생활의 여파였으니 이 글을 읽으면서 크게 동감했던 것 같다. 우리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교과서 물려받는 일을 큰 행운으로 알았다. 새 교과서를 사야할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내 기억에 지금까지도 뚜렷이 남아있는 이야기가 있다.
중학교에 입학 후, 수학참고서가 필요했다. 지금 책의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 당시 퍽이나 인기 있었던 수학참고서가 있었지만 온전한 책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찰나 오빠가 친구한테서 받은 것이라면 수학참고서를 건네주었다. 온전한 한 권이 아니라 단원별로 구분하여 나누어 엮은 것들 중 한 부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어찌나 좋고 든든한지 보물처럼 아껴가며, 숨겨가며 펴 놓고 공부를 했다.
책이 아깝고 소중하여 한 페이지마다 빠트림 없이 문제를 풀어나가던 어느 날, 한 귀퉁이에 작은 글씨로 설명을 곁들여 놓은 문제에 눈이 꽂혔다. 제곱근 구하는 방법이었다. 그냥 간단히 √2는 1.414, √3은 1.732 이런 식으로 외워가며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왜 1.414가 나오고, 1.732가 되는지를 풀어가며 설명해 놓았던 것이다. 꼼꼼하게 내용을 이해하며 풀어가노라니 정답이 딱 나오는 것이다. 아! 그때의 기쁨이라니! 난 지금도 그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그 풀이방법과, 풀어가는 방법을 ‘개평한다’ 고 하는 말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이렇게 깊이 각인된 이유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있었던 까닭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학시간에 선생님이 느닷없이 칠판에 여섯 자리 숫자를 기입해 놓고서는 이 수의 제곱근을 구 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셨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 손을 들었고 칠판에 나가 완벽하게 제곱근을 구했다. 그 날 선생님께 들은 칭찬이 얼마나 좋았던지, 무어든 먼저 알고 일찍 깨침이 얼마나 좋은지를 실감했던 것 같다. 그 당시 내가 만약 온전한 책이 아닌, 한 부분만을 엮은 헌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런 기쁨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마음의 양식을 쌓고 지식의 두터움을 안겨 준 소중한 책을 팔아야만 했던 시절의 위인들이 남긴 글이 나의 깊은 기억을 꺼내주며 흐뭇하게 해 준다. 책의 행간에서 나의 옛 시절이 생각났고, 그 때의 나만의 노력의 결과가 안겨주었던 기쁨을 새롭게 접하였다. 문득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삶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과거에 있는 것이란 생각에 이른다. 느낌만으로도 다감한 헌 책이 있는 헌 책방에 쌓여있을 무수한 옛 생각들이 새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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