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궁 입구
내내 오른쪽을 끼고 도는 금강물줄기를 따라 부여를 찾아가는 길에는 가을이 짙게 내려 앉아 있었다. 길 따라 펼쳐지는 풍광이 참으로 삽상하다. 조금 일찍 날아온 청둥오리 한 무리가 강물위에서 저희들끼리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강가 곳곳에서 강물을 굽어보며 피어있는 수초들마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알고 있는 듯 다감하다. 저 물살은 알고 있을까. 제 몸 위를 흘러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이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부여 부소산을 만나면 금강은 백마강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곳에는 고란사가 있고 낙화암이 있다. 금강은 이렇게 백제를 안고 덧없이 흐르고 있었으니… 백제의 옛 자취를 찾아가는 길은 불과 한 시간여의 행보지만 나는 기나긴 시간 여행을 하고 있었다.
지금 부여에서 재탄생한 1,400여 년 전의 나라 백제가 현재의 우리들에게 무한정 초대장을 보내주고 있다. 백제는 비운의 나라이다. 나는 그렇게 배웠다. 그래서일까 백제의 역사는 많이 훼손되었고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의자왕과 삼천궁녀를 배웠지만 사실 삼천궁녀라는 역사적인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한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황산벌에서 전사한 계백장군이 있었고 화려한 문화적 가치를 지닌 무령왕릉이 발굴되었고, 최근에는 익산의 미륵사지석탑에서 진귀한 유물이 발견되었지만 의자왕과 삼천궁녀라는 사실 앞에서는 아주 작은 사건으로만 알려질 뿐이다. 이런 왜곡됨을 비켜나서 한류바람의 원천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잠자던 백제의 문화를 깨우게 하기위한 문화 축제인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패자일 수밖에 없었던 백제의 문화를 만나게 해주는 아주 낯선 아름다움일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백제문화를 찾아갔다.
비운의 나라 백제는 온전한 성 하나 남겨놓지 못했다. 하여 이곳 부여에 사비성을 복원하는데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자료가 없었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성왕 16년 봄, 백제는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하였다’ 는 유일한 자료가 있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 역사의 빈틈을 메운 상상력으로 왜곡된 편견을 바로잡기 위한 이미지가 사비성복원이었다고 한다. 고증으로 복원된 사비성은 광활하고 웅장하였다.
또한 사비성 안의 한쪽에 세워진 능사(陵寺)는 조성한 백제문화단지의 가장 핵심적인 건물로써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인 대목장이 못을 사용하지 않고 만든 목탑이라고 하였다. 실제의 크기라 하는데 우선은 그 옛날 사람들의 섬세함과 기술력에 또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사비궁과 능사를 만나고 알맞은 경사의 계단을 따라 오른 곳은 제향루였다.
그곳에서 눈을 굽어 사비궁을 바라보노라니 울컥 한이 서려온다. 이런 웅장함을 지녔었건만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재기의 꿈을 안고 공주에서 쫓겨 이곳 부여로 내려왔지만 꿈은 스러졌을 뿐이다. 저 기와 지붕위에 얹어진 기와 한 장마다에 적군에게 유린당한 백성들의 한숨이 서려 있는 것만 같았다. 나라를 빼앗겨야만 했던 비운의 왕의 애틋함이 잡힐 것만 같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하는 정자의 날렵한 모습에도 서글픔이 가득하다.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결에 날리는 머릿결이 어지럽힌 듯싶어 몸을 돌린 그 순간 나는 그만 알 수 없는 평온함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저 아래 잘 정돈된 터에 납작한 자태로 웅크리고 있는 초가 마을을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 나에게는 안온한 초가마을이었다. 알 수 없는 안도감과 평온한 마음이 어우러지면서 충만함으로 가득 찬다.
백제의 시작인 위례성을 조성해 놓은 곳이라 하였다. 아, 시작이 이렇게 부드러움이라니… 이렇게 낮은 평온함이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몸부림은 크고 높고 날카롭게 변형시켰음이 분명하다. 가을빛에 부서지는 초가지붕에는 풍요로움이 가득하다. 둥글기도 하고 조금은 밋밋하기도 한, 부드러운 곡선은 서로를 아우르며 공존하고 있었다. 저 낮고 둥금 속에 도사리고 있는 온순함이 우리의 근본이 아닐까.
맑은 하늘아래의 초가지붕들이 품은 살아있는 이야기들은 우리의 역사다. 역사를 머금은 초가지붕은 정말 아름답다.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우리의 고향 같은 초가지붕을 바라보며 향수에 젖는 까닭은 이런 깊은 역사의 숨결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이것이 바로 역사이다. 제향루를 사이에 두고 처음과 마지막이 공존하고 있듯 역사는 돌아간다고 했던가? 지난 사람들의 흔적! 그들이 무엇을 생각했고, 어떤 형태의 삶을 살아갔으며 지금 우리와는 얼마만한 차이가 있었는가를…그 모든 것이 아주 친숙하게 다가오면서 현재의 우리와 비교할 수 있는 기회이기에 그들이 남긴 자취 한 조각이라도 놓치고 싶지 아니하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앞서간 선인들의 훌륭함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잘못을 거울삼아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게 하는 것이 역사가 아닐까 한다.
우리 선조들, 그들이 왜 그렇게 슬기롭고 지혜롭게 느껴지는지… 편리함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환경에서도 이토록 훌륭한 건축을 했다는 사실에 괜한 자부심이 생긴다. 요즈음을 사는 우리들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것을 가져다 사용하는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기에 지혜를 짜내야 할 일이 없으리라. 인간이란 불편함에서는 놀랄만한 지혜를 보이는가하면, 편리함 속에서는 한없이 나태해지면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 같다.
서둘러 돌아 나오며 천천히,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역사적 사실들을 만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변명하는 나를 금강은 이제 나의 왼편에서 따라온다. 오늘 나의 오른쪽과 왼쪽의 차이는 나만의 역사일 것이다.
능사
제향루
제향루에서 바라본 사비궁
위례성
위례성
위례성
(1021)
'마음따라 발길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無等에서 舞童(무동) 타던 날 (1) (0) | 2011.10.18 |
---|---|
선비의 꽃, 산청 삼매(三梅)를 찾아서 (0) | 2011.04.11 |
문화답사기(도솔암 마애불) (0) | 2009.09.21 |
한라산을 오르다(2) (0) | 2008.12.30 |
한라산을 오르다(1) (0) | 2008.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