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알 수 없는 묵직함이 내 가슴 언저리에 남아 있는 느낌이 들곤 한다. 책을 읽은 뿌듯함이기도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감정들을 정돈하기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저녁식사 후 그런 마음을 안고 산책길에 나섰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등 불빛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뜻 모를 영어단어들이 왁자지껄하게 들린다. 뒤 돌아보니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외국인 4명이 자유분방한 차림으로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늘 읽은 책의 주인공이 혼혈아였다. 길에서 만난 외국인 아이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저 아이들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책의 주인공처럼 조금은 예사롭지 않은 아이들이지 않을까. 저 아이들의 정체가 궁금하듯,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 번 쯤 내가 어디서 왔는가, 누구인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잠깐사이에 지나온 성장기를 더듬어 볼 수 있음에서인지 성장소설은 흥미진진하다.
네 번째 빙하기는 성장소설이다. 주인공 와타루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혼혈아이다. 그래서 늘 관심을 받지만 그 관심은 관심 밖의 따가운 시선일 뿐이다. 노을에 물든 하늘의 느낌대로 하늘을 붉게 색칠을 하건만 사람들은 그 느낌을 무시하고 이상한 아이로 취급한다. 어머니 또한 유전자연구라는 화이트칼라 업종에 종사하지만 미혼모로 살아간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상상의 나래를 달아 주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다행히도 주인공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믿고 용기를 주는 열린 사고방식을 지닌 어머니이기에 독자인 나로 하여금 안심을 하게 한다.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고심하던 와타루는 엉뚱하게도 어머니의 서재에서 크로마뇽인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추리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냈으며 그 추리는 믿음으로 굳어진다. 와타루는 아버지를 닮기 위해 돌칼을 갈고 창던지기를 하며 매머드 사냥을 하기위해 준비한다. 소년은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외모도, 머리 색깔도 다른 이유는 크로마뇽인의 후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터무니없는 믿음이지만 자신만의 믿음으로 정체성을 인정하고 불후한 환경에 적응하며 성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학교생활을 하는 도중,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둔 또 다른 불우한 여학생 사치를 알게 된다. 사치 역시 불우하지만 참 의로운 아이다. 둘은 서로 가까이 지내며 육체적 성장을 느끼는 사이가 되며 동반자가 된다. 그들은 격하게 혹은 억울하게 자신의 입장을 잘 견디어 낸다. “지구는 빙하기라는 수단을 통해 지상의 생물을 몇 번이나 걸러 냈다. 그리고 가혹한 환경을 극복한 생물에게만 미래를 주었다.” (95쪽)라는 말을 인용해 크로마뇽인이 그렇게 빙하기를 거쳐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와타루가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해 가던 어느 날, 어머니는 암에 걸리고 병마와 싸우게 된다. 의사는 1년 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내리지만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6개월을 더 견디게 해 주었다. 투병 중에 어머니는 와타루에게 아버지의 비밀을 알려준다. 아버지는 러시아인으로 어머니와 같은 연구원이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룬 후, 사치를 괴롭히는 사치의 아버지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러시아로 간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다. 아버지를 만나지만 와타루는 배신감으로 아버지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 크로마뇽인을 그대로 아버지라고 믿고 싶어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도움으로 그곳 박물관을 찾아가서는 그곳에 전시된 크로마뇽인이라 믿었던 아이스 맨의 유해를 훔쳐낸다. 그 순간 와타루를 찾아 러시아에 온 사치를 만나 함께 설원을 찾아간다. 훔쳐 낸 크로마뇽인의 유해를 빙하기 이전의 자리에 찾아주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둘은 설원에서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에서 사투를 벌인다. 겨우 겨우 오두막을 찾은 장면에서 소설은 끝난다. 아마도 지구의 빙하기를 거쳐 살아난 크로마뇽인처럼 둘은 그들만이 겪었던 혹독한 빙하의 시기를 거쳐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것임을 예시해 준다.
이 책은 와타루라는 불우한 소년의 순수함으로 쌓아지는 성장기가 담겨있다. 와타루의 삶속에는 우리들이 거쳤던, 혹은 앞으로 거쳐 나가야 하는 삶의 모습들이 들어있다. 또한 행간에 묻혀있는 삶의 지침의 말들은 보석처럼 빛을 발하며 감동을 준다. 좋은 환경에서 고생을 덜하고 자란 사람보다는, 비록 자신의 환경이 불우하지만 그 불우함을 딛고 일어서는 동안 쌓인 자신감으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는 사람이 훨씬 강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남들과 다르고 부족한 환경에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이 책에서는 그런 조건들은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음을 알려준다. 그런 조건들을 긍정적으로 가꾸어 나간다면 훨씬 월등한 조건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가을, 꼭 와타루와 같은 환경이 아닐지라도, 한번쯤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를 느끼며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읽어도 좋고, 자신의 지난 어린 시절을 대입해 같이 걸어보며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어른이 읽어도 좋은 책인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것이 아니다. 내 몸에 흐르는 피는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것이다. 인간도 생물도 길고 긴 고리로 연결되어 있고 또 과거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넘겨받은 바통을 들고 미래를 향해 달리는 릴레이 선수다. 그렇다면 앞만 보고 달리면 그만이다. (471쪽)
'감상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년의 믿음, 그림으로 (0) | 2010.01.21 |
---|---|
팀파니 협연 - 연주회 - (0) | 2009.11.16 |
[오두막]을 다녀오다. (0) | 2009.04.26 |
쌍둥이별 (0) | 2009.02.27 |
개밥바라기별 (0) | 2009.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