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문학 교수 한 분이 박철상 저 『세한도』를 꼼꼼하게 읽었다는 내용의 칼럼을 읽었다. 고전에 관한 유익한 책을 많이 저술하시는 그런 교수님으로 하여금 관심을 갖도록 한 책의 내용이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은 책을 읽고 싶다는 욕구로 이어졌다. 작자는 고문서연구가이시다. 이 책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관한 이야기다. 그 그림이 그려진 과정과 가치에 대해 또 그 그림이 우리에게 오게 된 과정과 함께 작자의 철저한 고증과 해박한 지식으로 세한도의 깊은 뜻을 풀어 낸 책이다.
지금까지 사진을 통하여 볼 수 있었던 세한도에 대한 나의 무지한 느낌은 썰렁함 이였다. 이런 세한도에 세인들은 왜 그렇게 열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교과서적으로 외워 두었던 세한도의 의미를 새롭게 각인 시켰으며 그 새로움에 너무나 뿌듯한 마음이었고 자랑스러웠다. 세한도의 거죽이 아닌, 내면을 알 수 있는 실낱같은 앎이 다가왔다. 세한도에는 추사 김정희의 인생역정과 그가 품은 예술적 혼이 다 담아 있었던 것이다.
추사는 그 시대의 양반가문의 자손이었다. 임금의 딸 공주와 혼인을 맺은 가문으로서 성장의 배경은 나무랄 데 없지만 그 영광은 그가 후에 제주도에 유배되는 연으로 이어지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아니할 수 없다. 후세인들은 추사를 천재라 여기는데 실제 그는 정작 그리 뛰어난 천재가 아니라 한다. 노력형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 우리의 것으로 재창출하자는 그 당시의 실학파들과 뜻을 같이한 학자이다.
당시의 시대 흐름상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중인이라 하여 천하게 여기는 관습이 있었다. 추사는 중국에 다녀온 후, 학문과 예술을 동시에 추구하는 학자들의 탐구정신을 깊게 받아들인다. 그림이나 글은 종이와 붓이 있다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이끌어 내는 작가의 흥취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하여 학문과 예술의 일치를 일깨워 준 선각자였다.
추구하고자 하는 학문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최적의 루트를 찾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의 것을 배우고자 할 때, 그 사람의 결과를 배우기보다는 그 사람이 그 경지에 도달한 경로를 배우라 하였다. 그 과정에서 나만의 창조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자신의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였다. 한 나라도 마찬가지라며 청나라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원했던 학자였다. 그런 연유에서일까. 중국에 건너간 사신들에게 중국의 학자들은 추사의 안부를 먼저 물을 정도로 추사는 중국에서도 많이 알려진 학자였다.
추사와 황산, 이재의 우정, 또한 나에게 진한 여운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서로를 안다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게 중요할 뿐, 거죽에 있는 것 아니라 하였다. 보이는 부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잠재력을 찾아 낼 수 있는 우정을 나누며 시와 학문을 함께 논하는 우정이었다. 서로 만나면 고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화를 품평할 뿐이라는 그들의 만남이 참으로 존경스럽다.
추사는 그의 인생의 최고의 정점인 시기에 억울하게 제주도 유배를 떠난다. 그의 처지가 그렇게 되자 그를 좋아하며 따르던 사람들은 하나 둘 씩 멀리 하거나 먼저 세상을 하직하니 추사는 말 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으리라고 한다. 그 중 단 한 명 그의 제자 (통)역관 이상적만은 그가 북경을 다녀올 적마다 구입한 귀한 책을 스승인 김정희에게 보내 주었던 것이다. 추사는 답례하는 마음으로 세한도를 그려주었다. 세한도를 받고 추사에게 답장을 보낸 이상적의 겸손한 마음은 나의 심금을 울렸다. 이상적의 말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아마 절실한 진리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후에 이상적이 이 그림을 가지고 중국에 가서 그곳 학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림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소감을 적은 제영(題詠)까지도 보관되어 있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나중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는 말의 뜻을 인용한 세한도의 깊은 뜻이 마음에 와 닿는다. 현재의 처한 심정을 단순한 그림으로 나타내면서 소나무와 잣나무의 의미로 제자를 아끼는 마음을 알려주었고, 글씨와 함께 그가 지닌 학문과 예술의 가치가 총 망라된 그림이었던 것이다. 세한도를 완성해낸 과정이 주는 교훈을 책을 읽는 동안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학자들의 면면을 엿보며, 그들을 배우고 싶으면서 그들이 나의 조상임이 한없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숙연한 책읽기였다,
이렇게 소중한 그림을 끝까지 지켜낸 후손들의 이야기도 가슴 뭉클하였다. 후에 세한도는 김정희의 최고의 연구가인 일본인 후지츠카의 소장품이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치닫고 있을 즈음 후지츠카는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서예가 한 분이 공습이 진행되고 있는 일본으로 달려가 끝내 그 그림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얼마 후, 후지츠카의 집은 공습으로 잿더미가 되고 그 사람도 사망했으며 그이가 평생으로 모아온 김정희의 모든 자료들도 사라져 버렸다고 하니 나는 가만히 가슴을 쓸어내리며 뭉클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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