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곳 일정한 목적지를 향하는 임시열차는 거침없이 달려간다. 중간에 쉼 없이 달리는 열차의 규칙적인 진동이 리드미컬하다. 기차가 달리는 길옆에는 또한 자동차만이 달리는 길이 있다. 거센 빗물을 모아 흘러내리는 물길 역시 또 다른 길들을 비켜 나아가고 있다. 길 위에는 길들이 어지러이 뻗어 있지만 그들은 서로 부딪치지 아니하고 제 길을 이어주고 있다.
이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산을 깎아 내려야하고 들을 자르기도 해야 한다. 무엇을 기초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단순히 눈앞에 펼쳐지는 구간만을 어림짐작으로 할 수 없다. 멀리, 높이 바라보며 길이 이르는 지점과 통과지점을 정확히 파악하여야 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지도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전도인 대동여지도를 만든 이는 19세기 조선 중기에 살았던 중인계급의 김정호였다.
학창시절에 열심히 외우고 다닌 이름 이였지만 그의 호가 고산자(古山子)였다는 사실은 이 책을 접하고서 처음 알았다. 작가 박범신은 이 책을 통하여 김정호가 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신산(辛酸)한 삶을 꾸려가면서까지 지도 만들기에 일생을 바치게 되었는지를 추적하였다. 내가 김정호의 호가 고산자임도 모르고 오로지 지도를 만든 이로만 알고 있듯, 김정호의 삶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너무 크기에 어쩌면 작가의 상상력이 더욱 풍부해 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며 자라온 김정호는 10살에 아버지를 잃게 된다. 현감이 홍경래 난을 진압하기위해 삼정(전정·군정·환곡)을 면제해 준다는 조건으로 진압군 지원자를 모집 하게 된다. 이에 김정호의 아버지와 마을 사람 20여명이 지원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관에서 내어준 지도 한 장을 들고 집결장소로 향하지만 잘못된 지도로 인하여 깊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모두 동사를 한다.
김정호가 살았던 시대현상은 암울하였다. 권력 부패와 외세침입, 천주교 반대 등 어지러움이 난무하는 가운데 또한 실사구시를 실현코자하는 학자들이 대거 등장한 시대이기도 하다. 김정호 역시 비록 중인계급 이였지만 의식이 트인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정확한 지도를 그려 온 산천하를 주인인 백성들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마음을 작가는 상상력으로 읽어내고 있다. 그리하여 김정호의 삶이 높은(高), 옛(古)산을 넘나드는 외로움(孤)이었다고 풀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는 사랑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다.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부용꽃 같다고 말하던 아버지, 고아가 되어버린 김정호에게 톱니바퀴 맞물리듯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인연으로 다가오는 혜련 스님과의 애틋한 이야기는 책에서 손을 놓지 못하게 한다.
전국방방곡곡을 떠도는 그에게 우정을 베풀어주는 인연들도 또한 이 책에서 만나는 귀함이다. 양반출신으로서 중인 김정호의 벗인 해강 최항기는 대단한 지식인이다. 앞서 살았던, 스스로를 간서치라 일렀던 이덕무에 비준할 정도로 책을 사랑한 장서가이다. 삿갓시인 김병언, 신헌, 최성환 등의 교우관계의 중요성과 참 됨을 알게 해주는 귀한 즐거움도 함께한다.
이 책은 소설이라 하지만 엄연히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둔 이야기이다. 학창시절 국사시간을 통해 실사구시, 이용후생 등을 열심히 배우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열심히 외웠지만 그 결과는 전혀 몰랐었다. 단순히 그 시대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안 것만이 전부였다.
하지만 작가는 이 책을 통하여 지도 한 장으로 실사구시의 실현됨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름 없는 사람들의 노고로 이루어진 그 업적이, 오늘 날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을 충분히 일깨워 주고 있다. 암기위주로 해왔던 지식을, 실제를 통하여 생생히 알려준 책이다. 실로 이 책을 다 읽었다고 책장을 덮기가 너무 아쉽다.
“바람이...... 가는 길을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길을 내 몸 안에 지도로 새겨 넣을까 하이. 오랜...... 옛산이 되고 나면 그 길이 보일 걸세. 허헛, 내 처음부터 그리고 싶었던 지도가 사실 그것이었네” (347P)
누가 알아주든 말든 그저 묵묵히 어려움을 이겨내고 지도를 그린 사람 김정호. 바람과 시간이 가는 길을 그저 내 몸 안에 내 그리고 싶어 했던 고산자 김정호를 생각하며 창밖의 내 뒷산을 바라본다. 이 여름 피서 계획이 없거나 갈 수 없다면, 이 한 책으로 전국을 눈으로 다니며, 사랑을 배우고, 변함없는 우정이 무엇인지를 깨닫기도 하며, 진정한 사람의 마음을 느껴볼 수 있기를 조심스레 권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