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산은 막 피어나는 진달래 빛으로 온통 수줍게 물들기 시작했다. 길섶에서 고개 쑥 내밀며 피어있는 진달래 한 가지에 세 송이 꽃이 나란히 피어있다. 참 재미난 행렬을 이루고 있음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앞선 꽃이 뒤 돌아 보며 빨리 오라 하니 가운데 꽃은 바람이 불어 옷 부여잡기에 바쁘다고 한다. 제일 뒤따라 온 꽃은 아예 뒤돌아서서 바람을 받으며 뒷걸음 걷는 모습이다. 한 가지에서도 이렇게 제 각각의 예쁨으로 피어나다니… 문득 박완서 선생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오늘 선생의 책, 기나긴 하루를 읽었기 때문이리라.
선생의 글을 읽다 보면 하나 같이 공통된 주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6.25 전쟁에 대한 일화라는 점이다. 선생께서 겪었던 전쟁의 참상은 아마도 평생 잊히지 않는 상처로 각인된 것이라는 것을 책을 읽을 때 자연히 알게 되었다. 선생 스스로도 전쟁 통에 겪은 수난과 상실을 증언하고자 하는 욕구가 소설가로 만들었노라는 고백을 글 중에서 자주 접하곤 하였다. 전쟁이라는 하나의 사실에서 절대 중복되지 않는 주제를 피력하심은, 저 진달래꽃이 한 가지에서 나란히 피되 각기 다른 모습으로 피어나고 있음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박완서님의 ‘호미’를 읽지 않았으면 책을 보내주시겠다는 메일을 받고서는 부랴부랴 책꽂이에 꽂혀있는 박완서님의 책들을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마음 작정하시면 꼭 이루고야 마시는 분이어서 이미 읽은 책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용케도 사진에 찍히지 않은 책 ‘기나긴 하루’를 보내주셨으니… 물론 이 책은 출간 되지 얼마지 않아서 그간 구입해 보지 못해서 책장에 없었던 것인데, 보내주신 정성이 가없어 몹시 바쁜 시기이지만 꼭 읽어야한다는 책임감으로 책장을 열기 시작했다.
한 두 페이지씩 읽기를 시작하니 이제는 잠을 자기위한 시간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책을 덮어야하는 경우가 되었다. 책을 보내주신 분의 마음과 작가님의 마음이 닮은 것처럼 느껴지며 나를 채근하기 때문이다.
박완서님이 돌아가신지 일 년이 되었다. 이에 즈음하여 생전에 발표한 작품 중 책으로 엮지 않은 단편소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빨갱이 바이러스>,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의 세편과 또 다른 작가들이 추천한 <카메라와 워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닮은 방들>의 세편을 한데 모아 발간한 책이 ‘기나긴 하루’다.
나 개인적으로 박완서 선생의 작품을 꽤 많이 읽었다고 자부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의 작고 후, 발표된 작품 목록들을 보면서 그만 깜짝 놀랐다. 이분의 일도 안 되는 책읽기였으니… 나의 자만이 하늘을 찌른다. 기나긴 하루에는 유작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기에 더욱 읽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선생이 전쟁 중에 수많은 고통을 감수하며 지내시던 시절에 나는 태어나지 않았기에 어쩌면 너무 다른 시대상황을 살아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선입견으로 선생의 어느 책이든 처음 읽기를 시작하면 별 대수롭지 않은 내용들이며 문장에 약간 실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알 수 없는 편안한 마음이 되곤 하였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깊이 빠져드는 경험은 어쩌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콕 집어 내주는 느낌의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내 의식 속에서 결코 빠져 나오지 못하면서도 뚜렷한 형체가 없는 그 아련한 그리운 것들이 선생의 책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음에, 세대차를 전혀 느낄 수없이 그 때 그 시절 우리의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조곤조곤 들려주시는 기분임을 떨칠 수 없다.
작가 자신의 실화를 픽션처럼 꾸며 나가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때론 내가 책 속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꾸밈이나 멋을 부린 문장도 없기에 어느 땐, 아 내가 써도 이 보다 더 좋은 문구가 나올 것인데 하는 망발도 가져보곤 한다. 책을 읽는 나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너 읽을 테면 읽고 말려면 마라 하는 식의 무관심한 표현 속에는 오히려 나를 끌어들이는 무언가 있고 다시금 읽게 하는 호소력이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무엇에겐가 그립다 말하기 직전 그 대상을 만난 것처럼 그리움을 해소시켜주는 힘을 느끼기도 하였다.
책의 제목처럼 길게 느껴지는 하루가 아닌, 단숨에 읽게 하는 매력이 있지만 내 시간에 맞추어 아껴가며 읽은 책이라 말하고 싶다. 이제 선생의 신간은 나오지 않을 것이니 마지막이라는 말이 무척이나 아쉽기에 아껴 읽고 싶은 마음으로, 읽기에 긴 시간을 할애했음을 변명해 본다.
책을 읽는 마지막 날, 읽기를 마치려는 욕심에 그만 저녁 찬을 준비 못한 채 식탁을 차리고 말았다. 그래도 아무 내색 없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아, 박완서님의 책이 이렇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지나간다. 아무렇게 차렸어도 맛있게 밥을 먹는 것처럼, 맛있게 읽을 수 있는 우리의 소박한 밥상 같은 책이라고… 선생은 그렇게 나의 평범함 속에도 진미가 있음을 잊지 말라는 무언가의 의미를 늘 부여해 주셨다. 이제 진달래를 바라보면 진달래빛 그리움으로 선생을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