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봉 (내원궁에서 바라봄)
이른 아침, 늘 해오던 새벽산책마저 접고 며칠 전부터 마음속으로 준비해오던 준비물을 하나씩 배낭에 넣었다. 먼데서 오신 좋은님들을 만나기 위해 정한 장소가 선운산이었다. 높지 않은 선운산을 오르며 그간 쌓였던 회포를 풀며 멋진 가을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픈 마음에 설렘이 앞선다. 차의 내비는 빠름만을 선택한다. 느긋하게 시골길을 달리며 가을풍경을 눈으로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비는 아마도 손님들 도착시간에 행여 늦을까 조바심하는 내 속 마음을 알아챈 듯, 빠른 길 그것도 두 개의 고속도로를 바쁘게 연결해주며 나를 데려가고 있다. 고속도로라고 가을이 없겠는가. 빠르게 달리는 속도에 맞추듯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음을 차 안까지 비집고 들어와 내 곁에 머물렀으니… 얼마만인가. 일 년만의 해후였지만 조금의 어색함이 없이 오히려 친근함만 더욱 두터워진 마음들을 껴안고 선운산도립공원으로 향했다. 우리들은 오늘 3시간 코스의 선운산 등반을 하기로 하였다. 선운산의 명소가 가장 많은 코스이기도 하다. 산은 오르지 않았지만 선운산(도솔산)이 품은 선운사는 동백 숲을 찾아 몇 번 찾아오기도 한, 낯익은 곳이기도 하지만 올 때마다 매번 새로움을 만나게 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선운사는 1,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이다. 서기 577년 백제 위덕왕 시절 검단선사는 절을 짓고 도적들을 모아 먹고 살아갈 방법을 가르치면서부터 선운사의 역사는 시작한다.
무리들을 분류하여 숯 만드는 법과, 닥나무로 한지 만드는 법, 또 바닷가에서 소금을 만드는 법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그 생활들이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지금의 전주한지공예와 곰소의 염전이다. 곰소에서 만든 소금을 지금까지도 선운사에 보시하고 있다하니 사찰과 민간의 유대를 재삼 생각게 하는 일이다. 송악 (천연기념물) 주차장에서 걷기 시작하자마자 만나는 첫 번째 보물은 송악이다. 한그루의 나무라고 하는데 바위에 딱 달라붙어 자라는 나무는 언뜻 보면 뿌리도 줄기도 보이지 않는 잘 자란 덩굴성 식물 같기도 하다. 선운산이 품은 3대의 천연기념물 송악, 동백숲, 장사송 중 의 하나이다. 이 식물의 북방 한계선이 이곳 고창이란다. 이 나뭇잎을 소가 잘 먹는다하여 소밥나무라고도 한다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데에는 조금 의아함이 앞선다.
가을 초입 선운사의 꽃무릇이 유명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를 맞이하는 꽃무릇은 단 한 송이도 만나지 못했다. 너무 늦게 찾아온 우리였다. 기다림에 길어진 주체 못한 꽃줄기들이 아무렇게 이리저리 쓰러진 모습들만 보였다. 어찌 꽃이 우리를 기다려 줄 것인가.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20여 일 동안 최선을 다하는 생의 리듬일진대, 그에 맞추지 못한 우리의 일상이었을 뿐이다.
각기 살아가는 리듬이 다른 쳇바퀴 돌리듯 돌리는 삶의 연속선상에서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기다림의 희망을 안겨주는 꽃무릇의 또 다른 모습을 보았으니 기약 없는 약속을 해 본다. 이곳 선운사뿐만 아니라 사찰 곳곳에는 꽃무릇이 많이 피는데, 이 꽃이 사찰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꽃 스스로 벌레들에게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독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독성을 채취해 단청 시 사용하면 단청색이 쉬 변하지도 않을뿐더러 벌레가 슬지않아 오래 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이 유용하게 사용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일까. 아마도 상사병으로 애달픈 진한 아픔이 독으로 남아 있지는 않았는지… 누구에 대한 원망으로 쌓인 울분일망정 곱게 다스려 스스로에게 이로움이 되도록 해야겠다는 어설픈 마음도 지녀본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발맘발맘 걷다가 일주문 못미처에서 비석을 만났다. 비에는 선운산가비라 새겨져 있는데 백제 가사 중 하나인 ‘도솔가’ 에 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전쟁터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내용의 가사라고 알려지는데 그 가사 내용은 전하지 않음을 애석히 여긴다는 비문이었다.
선운사일주문(도솔산선운사 라 쓰여있다)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선운산은 불가에서는 도솔산이라고 부른다 한다. 도솔가도 그렇고, 선운사 옆을 흐르는 천도 도솔천이다. 또한 일주문 에도 ‘도솔산선운사’ 라 쓰여 있다. 도솔(兜率)은 ‘열반한 스님이 미래의 미륵불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하늘궁전’의 뜻이라 하니 지금 우리는 하늘 궁전에 와 있는 것일까? 오늘 하루,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에 머문다.
선운사 천왕문
부도전을 지나고 선운사의 천왕문에 도착. 천왕문의 현판 글씨는 추사와 함께 조선 후기 3대 명필가 중 한 사람인 이광사의 글씨라 한다. 천왕문을 배경으로 사진 몇 컷을 찍고 우리는 하산 길에 선운사에 들려보기로 하고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도솔천의 반영
다리를 건너 도솔천을 따라 거슬러 오르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하천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데 이 도솔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동류천 이라 한다. 도솔천을 바라보면 맑은 물이 아닌 구정물처럼 새까맣게 보인다. 하지만 이는 오염되어서가 아니라 주변의 참나무과 낙엽들이 쌓여 뿜어내는 타닌 성분으로 검게 보인다고 안내문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검은 빛은 거울작용을 하고 있음인가? 유난히 반영이 아름다웠다. 실물인지 반영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세세한 그림자를 되 받아내고 있었다.
도솔천을 사이로 찻길이 아닌 사람이 다니는 길을 택하여 걷는 도솔암으로 향하는 길은 알맞게 굽어진 아기자기한 길이었다. 나무들이 내려준 그림자들이 더 없는 정감을 안겨주는 길이었다. 꼭 아기 손 만 한 단풍나무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참으로 깨끗하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은 모습~~ 곱게 물들을 즈음이면 아마도 천국의 길이지 않을까. 아니 우리는 이미 하늘궁전에 와 있는 것을… 지금 순간도 천국의 길이다. 좋은 마음들이 내뿜는 말없는 숨소리들에 전해오는 기분 좋음도 그대로 천국의 소리일 것이다.
진흥굴
다시 천을 건너와 차길로 들어선다. 행여 진흥굴을 지나칠까 싶어서였는데 이리도 저리도 연결되는 길임을 조바심이 앞지른 것이다. 조금 더 걷자니 과연 진흥굴이 나온다. 신라 진흥왕이 머물렀다는 설이 있어 진흥굴이라 한다는데 자연 생성된 굴이다. 그 시기에 어떻게 신라의 왕이 백제까지 와서 기도를 했을까? 은밀한 만남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안내표시도 없는 것일까? 굴 안으로 들어서니 시원하다 곳곳에 누군가의 기도 흔적들이 있으니… 인간의 이루고자 하는 욕심의 끝은 어디일까. 역사가 있기에 이런 깊은 마음도 통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 하늘궁전 어느 곳에 진흥왕이 계신다면 아마도 가련한 현세의 인간들의 소원 하나쯤 들어줘도 괜찮을 듯싶으니…
장사송
장사송과 천마봉
굴 바로 옆에는 우람하면서도 멋진 자태로 서있는 장사송이 있었다. 수령 600년의 반송으로 역시 천연기념물이다. 기념물답게 미끈하니 잘빠진 수형이 아름다웠다. 긴 세월과, 역사의 숨결을 보듬고 나란히 서있는 굴과 장사송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 감상하노라니 그들의 배경이 되어주는 커다란 바위도 하나의 마애불처럼 표정을 지니고 있다. 새로움을 만나는 기분에 뿌듯함이 전해온다.
도솔암
도솔암 약수
살짝 가파름을 오르자 도솔암이 보인다. 도솔암에서 바라보는 천마봉이 절경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바위덩어리가 그냥 산속으로 박아진 듯 꼿꼿함의 기상이 참으로 의연하다. 약수물로 목을 축이고 도솔암을 둘러본다. 어느 암자나 사찰에는 전설이 따라 있다. 이 도솔암 역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진흥왕이 저 아래 진흥굴에서 머물고 있을 때, 어느 날 밤 바위가 쪼개지며 미륵삼존불이 출현하는 꿈을 꾸고 지었다는 설이 있지만 백제와 신라라는 나라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과연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풍경이 있는 곳이기에 저절로 꾸며진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마애불
도솔암의 백미는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조심스런 마음으로 다가서니 우리는 작은 개미 한 마리처럼 작아 보인다. 너무 잘 알려진 마애불은 품은 이야기도 많기도 하거니와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읽느라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마애불의 모습에서 신령스러움을 느낀다. 마애불의 지킴이가 될까. 옆에 서있는 소나무의 모습에 유난한 눈길을 모아본다.
내원궁의 일주문(?)
마애불옆 나한전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 내원궁에 올랐다. 그렇게 올라서서는 몰랐는데 천마봉에서 바라본 내원궁은 거대한 마애불상의 머리뒤쪽에 자리하고 있으니 그 의미가 새삼스럽다. 그곳에서는 스님의 독경 따라 불자들이 절을 하고 있었다. 무엇을 그토록 간절함으로 정성을 들이고 있을까. 어설픈 마음으로 내 바램을 얹어보고자 했으나 어색한 내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곳에 계시던 보살님 한 분이 차 한 잔 드릴까요? 한다. 어색함에 괜찮아요 했지만 왠지 한 순간 마음이 심란해지고 말았다. 어설펐던 내 행동이 후회된다.
용문굴
내원궁을 내려와 다시 마애불 앞을 지나 낙조대를 향하여 오르는 길에 차나무 꽃을 보았다. 의외로 꽃이 드문 산길이라 생각한 마음에서 만난 차꽃이 반가웠다. 조금 더 오르니 용문굴이 보인다. 마치 커다란 바위가 옆으로 누워있는 밑으로 난 굴처럼 보였는데 의외로 큰 굴이었다. 대장금 촬영장소라는 안내판이 곳곳에 보인다.
낙조대에서 한낮의 해가 이글거린다.
대장금에서 최상궁이 떨어진 곳이라나?
낙조대에서 바라본 서해
이 산의 특징은 그리 높은 산이 아니기도 하지만 조금씩만 걸어도 명소를 만나는 재미가 있으니 지루하지 않았다. 드디어 낙조대에 도착! 과연 서해바다가 한 눈에 바라보인다. 한낮이어서 낙조는 볼 수 없었지만 저 서해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정말로 한 눈에 다 바라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다.
마애불과 내원궁이 멀리 보인다.
낙조대에서 바라본 산 능선의 풍경이 참으로 좋다. 울 좋은님은 한국의 아기자기한 풍경들이 참 좋다하신다. 하늘아래 오직 나 하나만을 품어 보이는 풍경들에 흠뻑 취하고 내려오는 길~ 급경사의 철제계단은 우리의 눈을 오직 자기만을 바라보라는 듯싶다. 이제 다시 도솔암으로 내려왔고 도솔천을 따라 선운사를 거친다. 오를 때, 하산길에 선운사를 둘러보자 했지만 우리는 그냥 이별을 하였다. 울 좋은님들 돌아갈 시간에 맞추려면 조금은 조급한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가만히 말해 보았다.
선운사 돌담길에 내려앉은 가을이 다소곳하게 우리를 배웅한다.
잘 있어~~ 울 좋은님들의 마음을 전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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