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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따라 발길따라

민초들의 희망을 품은 개태사

물소리~~^ 2013. 9. 16. 16:34

 

 

 

 

개태사 전경

 

   계룡산 등반을 계획하면서부터 일찍 산행을 한 후, 그 주변의 역사적, 문화적인 것들을 찾아보자 했었다. 동학사 주차장을 나오면서 우리는 내비에게 개태사를 물었다. 안내자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우리에게 30분을 가는 길 안내를 한다. 잘 뚫린 국도 l번 도로를 한참을 달리는데 잠시 후에 오른쪽으로 빠지라한다. 오른쪽으로 빠지니 아주 좁은 굴다리가 나온다. 1번국도 밑으로 뚫린 다리다. 너무나 초라한 굴다리여서 한 순간 잘못 들어왔나 했지만 다른 길이 없기에 조심스레 빠져 나왔다. 내비안내자는 용케도 굴다리를 지나왔음을 알고서 100m 전방에 목적지가 있으니 안내를 종료하겠다고 한다. 그래? 두리번거리니 멀리도 아니고 바로 코앞에 고색이 창연한 일주문이 보인다.

 

 

 

일주문

 

 

일주문 옆의 연못

 

순간 조금은 의아했다. 선지식으로 개태사의 역사는 꽤나 긴 연륜을 지니고 있음으로 알고 있는데, 깊은 산중도 아니고 그것도 차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 옆에 서 있는 절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건물의 초라함 보다는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더 맞을까? 천호산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었지만 절 주변은 들판처럼 휑했다. 절이라는 이름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자리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속세의 때를 벗어내는 절이 아닌, 오히려 때가 더 붙을 것 같은 그런 위치의 절이었다.

 

하지만 겉모습만 바라볼 일이 아니었다. 그간의 사연을 깊이 껴안고 있을 것이니 눈으로 확인해 볼 참이다. 보물도 있고 내심 꼭 보고 싶어 했던 철확이 이 절 안에 있으니 겉모습만 볼 일이 아니었다. 조금 오래 머무르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936년 (고려 태조 19년) 황산군(현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서 후백제의 항복을 받고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이 부처님의 은혜와 산신령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다고 여기며 연산면 천호리에 개태사를 창건하였다. 이는 망국의 설움을 안은 후백제 사람들을 다독이기 위함도 있었다고 한다.

 

 

 

 

 

 

 

절 안에 들어서니 커다란 감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휘날리는 태극기가 이채롭다. 새로 지은 요사채 건물의 마루에는 여인 두 명이 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관광객은 아닌 것 같고 아마 이 절에 관계되는 사람들일까? 눈길을 거두지 않으니 내 행동이 부담스럽다. 스님들 불경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오니 차츰 절이라는 공간임에 익숙해진다.

 

 

 

왕건 어전을 모신 진전

 

개태사는 왕건의 하명으로 지은 것인 만큼 왕건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이 있었으며, 또한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곳에서 길흉을 점치기도 하는 등, 왕실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절이라고 한다. 하지만 고려 말부터 퇴락하였고 조선 세종의 불교진흥책으로 잠시 중흥의 기틀을 보였으나 여러 시국을 겪으며 폐허가 되어 잊혀 졌다고 한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1934년 여승 김광영이 개태사지에 매몰되었던 삼존석불을 찾아내 세우고 현재의 자리에 절을 재건하였다고 한다. 하니 긴 역사를 지녔건만 건물의 명맥을 이어오지 못한 절이었다. 최근 논산시에서는 개태사지를 전국적인 명소로 만들기 위해 전반적인 보수공사와 없어진 건물들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삼존석불 (보물 219호)

 

석존삼불을 꼭 보고 싶었지만

스님들께서 열심히 불경을 드리고 계시는데 차마 들어설 수 없었다.

사진을 개태사 홈피에서 인용해 보았다.

 

혹자는 석존삼불을 미륵부처라 했다. 미륵은 화순 운주사의 천 여 개의 미륵처럼 민초들 마음속에 살아 있는 부처가 아니던가. 가렴주구의 현실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미륵을 세워놓고 희망을 꿈꾸어 왔는지도 모른다.

 

 

 

 

개태사오층석탑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되며

조각기법이 소박하고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탑

 

 

 

 

 

 

개태사철확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1호

철확은 개태사 주방에서 사용했다고 전하는 철로 만든 대형 솥이다. 지름이 약 2m, 둘레길이 6.28m, 높이 97cm이다. 임진왜란 때 이 솥에 밥을 지어 먹은 병사들이 잘 싸워 이겼다고 한다. 조선 후기 이 절이 폐허가 되면서 벌판에 방치된 채 있던 것을, 가뭄 때 이 솥을 옮기면 비가 온다고 하여 여러 곳으로 옮겼다가 일제강점기 때 서울에서 열린 박람회에 출품된 후부터 마을에 흉년이 들기 시작하여 다시 연산땅으로 가져오게 되었단다. 현재는 새로 건립한 지금의 개태사에서 보존하고 있다.

 

미륵도 그렇고 철확도 그렇고 괜히 민초들의 삶이 떠오른다. 또한 역사를 묻은 절만큼이나 잊혀 져 간 이야기 속에서 정여립이 떠오른다. 조선 선조 때 정여립은 다 무너져가는 개태사의 벽에서 발견한 글을 널리 퍼트린다. 그 뜻을 해석하면 무엄하게도 기축년에 세상이 뒤집어 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단다. 이에 조정은 왈칵 뒤집어 졌고 그 무시무시한 기축사화의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오랜 절을 찾아 역사를 읽어봄은 오늘을 살아가기 위한 지혜를 얻고자 함이 아닐까. 그 역사적 이야기가 있기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고픈 현장이다. 잘 복원되어 길이 교훈을 전해주며, 또한 우리는 마음의 부처를 따라 희망을 꿈꾸는 그런 삶이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