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을 지나고 부여, 논산을 찾아가는 길은 여행이라기보다 답사라는 말이 훨씬 더 어울릴 듯싶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어딘가 좀 부족함을 느끼는 나그네 길일 것 같은데도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면 볼 것도 많고, 보아야할 것도 많은 곳이 이곳 옛 백제의 땅인 곳이다.
낯선 곳에서의 길 찾기가 훨씬 쉬워진 요즈음 이다. 안내 멘트에 따라 길을 달리는데 눈앞에 야트막한 산이 있고 언뜻 높은 건물이 보이는 것 같다. 저곳이 혹시 관촉사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안내 멘트는 계속 우리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게 하니 아마도 그곳은 아니겠지 하며 따라 나섰다. 그런데 웬걸!! 아까 눈 여겨 보았던 그곳이 관촉사였던 것이다. 100m 남짓한 야산, 반야산에 관촉사가 있었다. 아, 그곳에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은진미륵이 있을 텐데… 아니 있다는 배움을 가지고 찾아온 길이다.
사실 관촉사라는 절 이름은 관심이 없었다. 오직 은진미륵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은진미륵을 알고 관촉사를 알았으니 절의 유래를 알고 싶었다. 관촉사의 안내 글을 보면,
고려의 한 여인이 반야산(盤若山)에 고사리를 꺾으러 갔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찾아가 보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에서 아이 울음소리만 들렸다고 한다. 이 소문은 고려 조정에까지 퍼져 광종(光宗) 임금은 당시 최고의 고승이었던 혜명(慧明) 스님을 불러, 그 바위로 불상을 만들라 명했다고 한다. 38년 동안에 걸친 불사가 완성되고, 높이 18.1m 둘레 11m, 귀의 길이만 해도 3.3m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불상이 968년 모셔졌다. 그때 미륵부처님의 미간 백호에서 찬란한 빛이 발해 중국 宋나라에 까지 이어졌으며, 그곳의 지안 스님이 빛을 따라 찾아와 배례한 뒤, "마치 촛불을 보는 것 같이 미륵이 빛난다."라고 한 뒤로, 사찰 이름을 관촉사(灌燭寺)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일주문 안 깊숙이 까지 늘어선 상점들
그런 깊은 연륜을 지닌 관촉사의 일주문은 여느 절 처럼 정숙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일주문 안으로까지 상점들이 들어서 있었고 주변은 가옥들이 있었다. 조금 더 걸어 사천왕문에 이르러서야 사찰 분위기가 났다. 사천왕문을 통과해 보이는 풍경에서 이끼내음이 진하게 밀려왔다. 세월의 더께를 알려주었다. 아무렴 천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잖은가.
대광명전
2층처럼 보이지만 안에서는 하나의 층이다.
절에 오르는 계단이 마치 불국사를 연상케 한다. 한발 한발 오르며 반야산 깊은 곳의 미륵을 만나러 갔다. 일주문, 천왕문, 반야루를 지나자 2층 구조의 대광명전이 서 있다.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나는 무엄하게도 부처님을 뵙기도 전에 은진미륵을 향해 걸었다 아! 교과서 속의 은진미륵!! 와! 정말 높았다. 감히 크다고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전해온다. 은진미륵의 정식 이름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이며 보물 제 218호로 지정되어 있다.
교과서에서 배운 은진미륵을 이제야 만나다.
1,000년을 훨씬 넘긴 세월인데, 그 시절에 이렇게 큰 불상을 어떻게 일으켜 세웠을까. 광종의 지시로 석불을 만들던 혜명대사가 네 부분으로 나눠 조성한 석불을 쌓아 올릴 수가 없어 걱정을 하고 있던 중, 동자들이 강가에서 돌을 쌓고는 그 둘레를 흙으로 둘러싸는 것을 보고 세울 방법을 깨닫고, 석불 주위로 흙무더기를 다져 비스듬한 언덕을 만들어, 끌고 올라가서 쌓았다는 설명이다.
미륵 앞의 석등은 그대로 미륵을 닮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석등이라는데 어딘가 모르게 균형미가 없어 보인다. 은진미륵의 무작정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는 석등을 만들지 않았는지… 석등을 바라보는 미륵님의 눈길이 그윽하시다.
석등 앞의 석탑은 오층이라지만 4층이다. 오랜 세월에 마모된 흔적이 역력하다. 멀리서 봐도 매혹적인 미륵불상과 석등과 탑의 조화로움이다. 이곳 관촉사에는 석물이 많다. 석등, 석탑, 석문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석탑과 나란히 있는 배례석! 어쩌면 석탑보다도 더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유물인 것이다. 예를 갖추는 장소로 사용 했다고 하는데, 향로나 촛대 등을 올려놓았던 봉로대가 맞다는 학설도 있다. 내 눈에 무엇보다도 새겨 놓은 꽃 모양의 정교함이 놀랍기만 하였다.
미륵전 , 석탑, 석등과 나란히 서 있는 미륵불
미륵전 현판이 걸린 미륵전 안에는 미륵불이 없다. 통 유리창을 통해 마당의 미륵불께 예를 올린다고 한다. 정말 저리도 웅장하신 미륵불님이 계시는데 또 다른 부처님을 모실 수 있었을까.
미륵전을 뒤로하고 돌아서니 자그마한 돌문이 보인다. 사실 이 석문에 대해선 아는 바 없이 왔기에 그냥 지나칠 수 있었지만 왠지 모를 호기심으로 바짝 다가가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나라에 단 하나 남은 석문이란다. 이 절을 창건할 당시에는 절 내에 들어서려면 이 석문을 통과하는 길밖에 없었다고 한다. 관촉사가 건립된 후 동·서·남·북 4곳에 이러한 문을 두었는데, 그중 동쪽에 세운 이 문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왼쪽 기둥에는 '해탈문' 이라고 한자로 써있고, 오른쪽 기둥에는 '관촉사' 라고 한글로 써 있다.
창덕궁의 석문 '불로문'
순천 정원박람회장의 한국정원
창덕궁의 불로문을 본 떴다.
문이 작아야 겸손해 보인다 했다. 작은 문을 통과해서 거대함을 만나는 일, 그 경이로움을 그 시대의 사람들은 벌써 깨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문이 창덕궁 경내에 있었던 걸 기억한다. 작년 늦가을에 찾은 창덕궁의 석문에는 ‘불로문’ 이라는 글씨가 새겨있었다. 단순히 왕들의 건강을 위한 조각물이 아닐까 여겼는데 오늘 관촉사 석문의 의미를 새겨보니 그 또한 다시 새겨 보고 싶다. 창덕궁의 불로문 석문은 지금 열리고 있는 순천정원박람회장의 한국정원에도 따라 설치해 놓았으니, 이 석문이 지닌 높은 뜻을 마음 깊이 새겨 두고 싶다.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다는 윤장대란다. 티베트의 마니차를 닮았다. 천년 세월 속에 끼어 든 요즈음의 세태랄까. 석문 옆에 세워진 윤장대의 모습에 조금은 낯설음이 앞선다.
이제 다시 반야루를 지나 경내를 벗어나 다시금 계단을 내려오는데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나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것 같다.
장구한 세월을 지켜 내려온 거대한 미륵상을 짧은 시간에 만나보고서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만 그에 동반된 이야기와 내재된 철학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면, 오늘 내 발걸음이 더욱 보람된 것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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