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가늘어진 바람결이 내 옷 소매를 길게 내려주더니,
밤송이들이 수줍게 밤빛을 발하더니,
가을이란다. 가을빛이라 한다.
계절이 변할 때 마다 달라지는 기온의 변화는
참 가슴 설레는 눈부심을 만끽하게 해준다.
더욱이 가을이 오면, 갑자기 뚝 떨어지는 기온에
살갗이 오소소해지며 느껴오는 싸함은 가슴 울렁이게 한다.
울렁임은 가을을 안고 있는 그 무엇에라도 마음을 내려놓고 싶게 한다.
바람과 코스모스와 이름 모를 열매들이 더욱 정겹게 느껴지는 가을날이지만
바쁜 일상은 마음만 동동거리게 한다.
마음씨 좋은 친구가 한번쯤 멋진 곳을 찾아가
우리 작은 마음속에 가을을 담아 오자고 청한다.
금방이라도 갈 것처럼 여운을 남겨두고서는
뒤돌아서서 갈 수 없음을 전하는 내 마음이 하얗게 탄다.
겹겹이 싸여지는 하얀 마음으로 나서는 출근길.
고갯길을 막 돌아 내려서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한꺼번에 내 눈으로 들어온다.
아!! 가을은 이렇게 바로 내 곁에 있었다.
하얀 머리를 바람결에 내 맡기며
나 보다 더 진한 애달픔을 파란 하늘에 맡겨 버린 듯,
무심한 모습이 바로 내 곁에 있음을...
솟은 아파트 틈새의 작은 공간에 터 잡은 억새의 잔잔한 춤사위가 나를 사로잡는다.
멋진 곳을 친구와 함께하는 여행이 아니어도,
가을은 어느새 내 곁에 찾아와 하얗게 변한 내 마음을 알록달록 물들여 주고 있었다.
멀리 떠나지 못함에 서운해 해야 했던 그럴 일이 아니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억새는 바람들을 제 몸에 싣느라 부산하다.
억새는 바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제 몸에 실은 바람을 어디론가 떠나보내는 억새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저희들끼리 부딪히며 흐느적거리며 사각거린다.
억새를 만나는 일은 민둥산이 아니어도 좋다. 천관산이 아니어도 좋다.
유명한 산이 아니어도 좋고 햇살 좋은 날이 아니어도 좋다.
쓰레기장 옆이어도 좋고 길가에 자리하여 지나는 자동차들에 스쳐도 좋다.
관심만 가지면 눈 가득 들어오는,
지천으로 피어 있는 억새는 가을꽃이다.
꽃이지만 꽃이 아닌 것처럼 시치미 떼기도 한다.
무어라 딱히 짚어 말 할 수는 없어도 맑은 하늘아래 수굿하게 서서
모든 것을 달관한 듯싶은 점잖은 모습이 그냥 좋다.
어느 곳이든 제 몸이 있는 곳을 아랑곳하지 않고
좋아하는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억새는 바람을 그냥 제 몸에 싣는다.
바람 한줄기도 놓치지 아니하려고 일제히 한 곳을 향해
서로 부딪히는 모습에서 숭고함이 보인다.
누군가의 염원을 안고 하늘에 이르고자 함일까.
내 작은 염원도 저들 사이에 끼워 넣고 싶다.
세상살이는 처한 순간 제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隨處作主:수처작주)는 말처럼
억새는 바람을 기다리다가 바람을 만나는 순간 세상의 주인이 되어 버린다.
지난 일은 바람결 따라 흩어버리고 순간에 몰입한다.
무언가에 직면하면 이리저리 따지고 몸을 사리는 나를 무색케 한다.
억새를 만나면 그냥 괜히 한 움큼 꺾어 들고 싶은 마음이다. 억새는 억세다.
취하고 싶은 마음에 힘을 가하면 억새는 날카로운 잎으로 공격한다.
가냘픈 몸을 지탱하기 위한 억셈이
끊임없이 무단하게 흔들리는 몸짓에서 음악으로 흐른다.
부드러우면서 애잔하게 흐르는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쯤이면
억새풀의 가냘픔과 부드러움과 억셈을 표현하는 듯싶을까.
가슴이 싸해오는 내 마음과 가슴을 파고드는 음악을 함께 안겨주는
억새들의 춤사위를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 몸을 잊어버릴 만큼의 애틋한 마음과
가슴의 싸함을 느낄 수 있는 가을 날씨와 애상어린 음악이 있고,
이 모든 것을 지닌 억새가 이렇게 내 가까이 있었다.
이제 이렇게 가을 속에 푹 빠져 버려도 후회 없을 그런 날들일 것이니
나는 이 계절 속 내 삶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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