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M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곡이 흐른다. 일요일 일상으로 종종거리던 움직임을 멈추고 무슨 곡이더라? 하는 의문에 휩싸이면서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분명 곡명을 알고 있었던 곡인데 아무리 생각하려해도 생각이 나지 않으니 내 머리는 금방이라도 쥐어 짤 듯싶다.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정답을 유도해 보지만 통하지 않는다.
통즉불통(通則不痛), 불통즉통(不通則痛)이라 하였다. 통하면 안 아프고, 안 통하면 아프다 했는데 지금 이 순간 내 마음과 머리는 불통이 되고 있다. 서로 간에 소통이 이루어 지지 않는 답답함으로 꼭 알아야한다는 의식에 마음이 아프다. 곡이 끝나고 진행자가 설명을 해주기 전에 곡명이 얼른 떠올라 주었으면 좋겠다고 혼자 안달을 한다. 기어이 혼자 알아내야겠다는 오기로 라디오의 스위치를 껐다. 마음이 괜히 쓸쓸해진다.
베란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가을바람이 삽상하다. 요즈음 들어 무언가를 잊어버리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알베르 카뮈는 인간이란 단지 몇 개의 보잘 것 없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뿐이라 했다. 그에 준하면 가끔 듣는 음악의 곡명 하나쯤 모른다 해서 큰 일이 나는 것 아닐 것이다. 다만 내가 지니고 있는, 더 보잘 것 없는 생각들이 그나마 유익한 것들을 몰아내고 있다는 믿음에 허무해진다. 가을 햇살에 허무함을 비벼보고 싶다. 대충 정리된 일상을 뒤로하고 낮 산을 올랐다.
주차장을 막 벗어나는 곳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받아내기 위한 작은 수로가 있다. 평상시에는 물이 흐르지 않지만,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아주 귀엽게 졸졸 흐르는 물줄기를 볼 수 있는 장식품 같은 수로이다. 그곳에 고마리와 닭의장풀 꽃이 어우러져 피어 있다. 내 마음 탓일까. 작은 모습의 꽃들이 유난히 작아 보인다. 가을꽃! 내 눈과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면 그들이 지닌 가치를 몸 저리게 느끼지 못한다. 자꾸만 애잔해지는 마음 탓인지 가을꽃들의 조급함이 보이는 듯싶다.
봄, 여름에 피어난 꽃들은 이미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 시기에 뒤늦게 피어난 꽃, 그래서일까 가을꽃은 자신을 치장하기 보다는 빨리 씨앗을 맺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열심이다. 시들은 잎에 의존하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햇살 가득한 곳에서는 마음껏 볕을 마시느라 제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서 있다. 숙살(肅殺)이라고 하였든가… 가을 기운에 제 잎을 말려가며 영양분을 열매에 모으기 여념이 없다. 종족 번식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가을 식물들의 생각은 보잘 것 없는 것이 하나도 없음이다.
가을꽃들이 제 잎을 말려가면서 부지런히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데, 난 얼마만큼 아이들을 위해 나 스스로 희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부끄럽다. 일 하고 있다는 핑계로 내 얼마나 우리 아이들을 위해 주었던가. 차츰 스스로의 둥지를 틀어가는 아이들의 마음이 가을빛처럼 애잔하게 파고든다.
산길을 걷는 일은 나 혼자지만 나는 온갖 사물들과 함께 하고 있다. 꽃, 풀, 나무, 새, 그리고 하늘이 저마다 각각의 차림으로 나와 함께 해 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도 이상 기후에 민감한 듯싶다. 올 가을은 유난히 억새들의 춤사위가 늦어지고 있다. 행여 멋진 자태를 만날 수 있을까 이리저리 마음 해찰을 하기를 여러 날이다. 하지만 이제 막 허물을 벗은 어설픈 모습이다. 아직은 멋진 갈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요즈음 유독 눈에 들어오는 풀이 있다. 실새풀이다. 그냥 아무렇게 서서 꽃 아닌 꽃을 피운 실새풀이 정갈하고 소박하다. 풀이지만 그냥 풀이 아니다.
한 번 마음이 쏠리면 계속 그 모습만 보이는 터, 이 산에 실새풀이 이렇게 많았을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한 발자국 건널 때마다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한결 같은 가벼움을 만난다. 금방이라도 꺾일 듯 가느다란 줄기에 달린 꽃이 그냥 먼지처럼 가벼워 보인다. 살짝 이는 바람에도 온 몸을 흔들지만 결코 경망스럽지 않다. 오히려 가녀린 몸으로 바람을 연주하고 있다. 그러다가 제 흥에 겨우면 살랑살랑 춤을 춘다. 그 가벼움으로 받아내는 가을 햇살은 얼마나 가벼울까. 가볍고 가벼운 것들끼리 모여 가장 안온한 가을 산을 이루고 있다.
한참을 서서 바라보노라니 내가 햇볕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쩌나 저들은 열매를 익히기 위해 한순간이 아까울 텐데… 저들은 내 욕심으로 인한 번잡함을 비우고 가벼워져라 일러 주었는데 나는 일조권마저 빼앗고 있었다. 그만 무언가로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에 머무는 순간 마음이 확 밝아진다. 그래 저 모습을 수놓아보자. 몸과 마음의 불통으로 답답했던 내 마음이 밝아진다. 그 모습을 수놓아 치장하며 내 마음에 덩달아 수놓아 보는 달빛 은은한 가을밤, 가벼운 풀꽃에 기대어 마음을 가볍게 씻었다.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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