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였다. 난 분명 양손에 장갑을 끼고 산을 다녀왔는데 세탁기에 넣으려는 순간 오른쪽의 장갑만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현관과 내가 지나온 곳을 몇 번 훑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한 짝에 연연해하지 않고 그냥 한 짝만 세탁을 하였다. 여름철 산에 다닐 때 사용하기위해 허름한 면장갑 몇 켤레를 사두고 번갈아 가며 사용하고 있었기에 아무것이나 짝을 맞추면 짝이 되었기에 한 짝만 남았다고 하여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산행을 마치고 되돌아오는 길, 일봉우리 벤치 한 쪽 끝에 무언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무어지? 하고 바라보니 어제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나의 장갑 한 짝이었다. 반가웠다. 아마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만 땅에 떨어뜨린 것을 모르고 지나쳐 왔음에 분명하다. 버려도 그만인 허름한 장갑이었기에 까마득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뜻밖의 만남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걸 주워서 벤치위에 올려놓은 누군가의 마음에서 참 알뜰함이 느껴졌다.
장갑 한 짝을 냉큼 집어 들고 내려오노라니 갑자기 장갑에게 부러운 생각 들었다. 장갑은 어제 하루, 지난 밤 내내 숲속에 있었다. 나는 하루 중 겨우 1시간여를 스쳐 지나는 숲일 뿐인데 나의 장갑은 하루 24시간을 이 숲속에 있었다.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풀벌레소리 가득한 고요한 새벽 숲을 머뭇거리며 살금살금 내딛는 나였다. 내가 떨어뜨린 나의 장갑은 제 몸을 놓아놓고 고요를 움켜쥐고 있었을 것이다. 움켜쥔 고요 속에서 가을을 맞이하는 숲 속의 수런거림을 모두 들었을 것이니 나는 나의 장갑 한 짝에 애정을 쏟으며 난 그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떼쓰고 싶다.
이 나무와 저 나무가 서로 어깨를 걸고 다정스레 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다. 환한 달빛에 나무와 나뭇잎이 서로 다른 그림자를 내리며 땅따먹기 놀이를 할 때 누가 이겼는지를 알고 있을 것 같다. 가을꽃을 피우기 위해 낮 동안의 햇빛을 더 많이 받고 싶어 밤 동안 뒤꿈치를 올리며 키를 키우는 꽃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다람쥐들에게 도토리를 건네주고 싶은 도토리나무들이 아닌 척 하면서 밤 새 살짝 도토리를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바람마저 잠든 고요한 숲속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고운 낙엽을 주워 나에게 건네주고 싶었을 것이다. 다른 짐승들에게 잡혀먹기 싫어 밤 새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하는 새들의 잠 못 이룸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봄 날 여린 고사리들이 도르르 제 몸을 말고 있었던 까닭을 이제는 알았을 것 같다. 도르르 말아 쥔 꿈을 이제 활짝 펴고 저리도 곱게 가을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알려 줄 것이다. 아, 그렇구나. 고사리는 제 꿈을 제 안으로 그렇게 모아 키우고 있었구나.
제 몸 부실해 꽃을 피우지 못하는 못난이 꽃봉오리에 이슬이 입맞춤해 주는 모습도 보았을 것이다. 그 꽃들은 내년을 꿈꾸며 더 튼튼하게 자랄 것을 약속하는 이야기도 들었을 것이다. 아, 바람이 지나는 길도 보았을까. 나는 그 길을 꼭 물어보고 싶다. 흔적조차 없는 것은 바람길 뿐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 바람 길이라 여겨지는 곳, 하늘의 이야기도 알고 있을 것 같다.
밤 새 외로움에 지쳐 파르르 떨고 있는 새벽별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달님의 이야기도 알고 있을까. 아, 그렇다면 나는 어찌해야할까? 좋은 날씨에만 제 몸을 보여주는 달님에게… 한 달 중 반절의 날에만 보여주는 새벽달에 나는 나의 마음을 가장 많이 전했는데… 그 말도 나의 장갑은 알고 있을까. 나는 차마 하늘의 이야기는 묻지 못하겠다.
잃어버려도 괜찮다고 여겨질 하찮은 것에 나의 애정을 다 쏟을 만큼 다정스레 마음이 쏠리는 까닭은 내가 가장 소망하는 소중함을 지녔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잃었다 찾은 장갑 한 짝을 통하여 내 마음에 찾아든 가을의 무늬를 어떤 예쁜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추분 지난 후에 찾아든 가을의 애상스러움은 모든 것을 맑고 투명하게 하는 빛을 지녔다. 내 마음을 흐르는 물빛과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마음 빛을 이 가을에 소중함으로 간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잃었다 찾은 장갑에게 다가가는 내 마음처럼 온통 그대가 지닌 것이 소중한 까닭이라고 말하고 싶은 계절 가을이 왔다. 맑고 맑은 가을날에 내 마음도 투명하게 맑아졌으면 좋겠다. 그 맑음이 소중함으로 다가가 귀히 여겨지는 마음이 되고 싶다는 소망으로 뒤척이는 마음은, 아마도 내가 겪는 가을앓이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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