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을 올랐다는 안도감과 정상이 안겨주는 기쁨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이제 내려가야 한다. 이 좋은 풍경을 언제 또 다시 만날까 하는 아쉬움이 컸지만 풍경조차 마음에 담지 말라는 어느 선각자의 말이 퍼뜩 떠오르며 나의 내려가는 발길에 힘을 실어 준다. 다듬어지지 않은 환경에서 자란 꽃들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인다. 이별의 슬픔이다.
그 모습을 담아보려 카메라를 꺼냈는데 웬일인지 작동이 되지 않는다. ‘렌즈의 오류이오니 대리점에 문의하시오’ 라는 자막만 계속 뜨는 것이다. 어쩌나~~ 오르는 내내 사진을 찍으며 내 맘대로 빛을 조절한다고 렌즈 돌리기를 거듭 반복해서 탈이 났나보다. 큰일이다. 어쩔 수 없이 카메라를 접고 폰카메라로 대체하기로 작정했지만 나에게는 서툴기만 할 뿐인데… 올랐던 길 되돌아 내려오는 길이 아닌, 우회하여 상왕봉을 거쳐 내려오는 길을 택했기에 앞으로 새로움을 많이 만날 텐데 사진기의 아쉬움이 컸다. 그나마 폰카메라가 있음에 마음을 다스리며 걸음을 옮겼다.
아, 오대산이 육산이라는 걸 지금 이 길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 호젓함을 안겨주는 부드러운 길이다. 우리 뒷산 오솔길 같은 아기자기한 길이 이어지고 있으니 남편의 발걸음이 나를 훨씬 앞서간다. 다행이다. 편안한 길은 갈수록 깊은 원시림을 보여준다. 특히나 기기묘묘한 신갈나무들의 자태가 어찌나 우람하고 거대한지 나무 밑동 한 번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나무 끝이 보이는 경우이니 발걸음이 자꾸만 더뎌진다.
헬기장, 헬기 대신 잠자리가 날고 있다.
헬기장의 꽃밭~ 아! 눈부셔~~
탐스럽게 익어가는 수리취
갑자기 나타난 환한 장소! 벌써 상왕봉인가? 하는 의아심은 순간 지나가고 헬기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높은 산에는 위기를 대비해 이렇게 헬기장을 만들어 놓는다는 남편의 설명이었다. 나무들을 제거한 탓으로 주위는 온갖 키 낮은 꽃들이 만발하였다. 이제 여름 꽃들은 시들해지면서 열매들을 맺고 있는가하면, 가을꽃들이 슬며시 고개 내밀며 함께 어울린 정경에 정말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정겨움이 가득 밀려온다. 눈부신 햇살에 조금은 찌푸린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주목(고사목)
역광으로 찍을 수밖에 없었다.
비로봉에서 상왕봉에 이르는 길을 나는 나무들의 숲이라고 명명하고 싶었다. 고산지인 만큼 주목나무들도 많았는데 그 어느 곳의 주목들보다도 거대한 나무다. 비로봉 정상에서 몸과 마음을 무장해제한 까닭일까? 기묘하게 뻗은 나무들의 모양새가 더욱 기품 있어 보인다. 저들은 얼마만큼의 중첩된 시간 속에 머물면서 저들만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생성했을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만의 시간과 속도로 변화해 나가고 있음을 알겠다. 그 속에 서있는 나 역시 지금 이 순간 변화의 속도를 지니고 있겠지. 그래서 더욱 소중한 마음을 챙겨본다.
아스라한 저 길은 어디를 찾아가는 길인지...
드디어 상왕봉에 도착!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 중 오늘 두 곳의 봉우리를 만났다. 소박한 봉우리였다. 표시석과 돌탑이 서 있을 뿐이다. 하늘은 쾌청하니 먼 곳의 풍경들이 뚜렷하다. 육신은 힘들지만 눈은 더없이 호강하다. 폐부 깊숙이 스며 들어오는 산내음이 참으로 향긋하다.
저기 저 산위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은 어느 곳을 향한 길일까? 문득 아, 이곳이 강원도이지 하는 생각과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 라는 말이 생각난다. 인제. 원통 모두 강원도 깊은 산골의 지명이다. 저 산을 지나는 길이 혹시 이처럼 깊은 산골을 향해 가는 길이 아닐 런지… 문득 애틋함이 물씬 느껴진다. 잠자리 한 마리가 맴을 돌다 질경이꽃 위에 앉으며 나하고 벗하자 청해 온다. 외로웠을까. 나그네를 부르는 저 가벼운 몸짓이 애처롭다.
임도의 자작나무
참나무고목들과 어우러진 야생화들의 멋진 자태를 원 없이 구경하며 걷노라니 삼거리길 안내판이 보인다. 점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아래를 향해 걸어왔다. 마지막 힘을 다 해 30여분을 걸으니 임도가 나타난다. 아! 이제 산길은 다 걸었나 보다. 이 임도는 북대암까지 가는 비포장도로였다. 우선은 편안한 마음으로 임도를 따라 상원사주차장을 향했다. 군데군데 모여 있는 자작나무들의 포즈에 절로 눈이 즐거워진다. 하지만 퍽 지루한 길이었다. 차라리 산길이 나은 것 같다는 내 말은 아랑곳 하지 않고 저만치 앞서가는 남편의 발걸음이 씩씩해 보인다.
한치의 빈틈없는 산
상원사 주차장이 보인다.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문득 뒤를 돌아 산을 바라보니 울울창창한 나무들의 짙푸름이 나를 짓누르듯 밀려오는 것 같다. 하나하나의 빼어난 아름다움보다는 내세울 것 없지만, 평범함이 모여 집합을 이루면서 또 다른 총합미를 이루는 산이기에 먼 산을 바라보기만 하여도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참으로 고마웠다. 저들이 주는 혜택이 얼마나 많은지... 오늘 새삼 나는 유독 많은 선물을 받은 것 같으니 마음이 싸해진다.
아, 저 멀리 주차장이 보인다. 이제 다 왔나보다.
여행은 떠남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함이라고 했는데
나는 정말 이렇게 출발점으로 되돌아 왔다.
나의 힘듦을 잊게 해준 꽃! 꽃들~~
투구꽃
초롱꽃
흰진범
송이풀
미역취
동자꽃 (한창때가 지남)
까실쑥부쟁이
고마리
등골나물과 나비
노랑물봉선
참싸리
병조희풀 씨앗
각시취
좁쌀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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