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일간지에서 우연히 이청준작가의 일화를 읽게 되었다. 글쓴이는 남도지방 문인들의 고향을 찾아보는 일정 중 이청준작가의 생가를 찾아간 것이다. 생가 마루위의 작은 밥상에 놓여있는 방명록을 보며 이청준님을 회고한 글이었다.
이청준 어릴 적엔 집 앞까지 바닷물이 들던 갯벌이었다. 그 갯벌에서 60년 전 이청준이 도회지 중학교로 유학 가기 전날 모자(母子)가 게를 잡았다. 홀어머니는 가난했지만 아들을 맡아줄 친척집에 빈손으로 보낼 순 없었다. 이튿날 이청준이 삼백리 버스길을 가 친척집에 닿자 게들은 상해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친척 누님이 코를 막고 게 자루를 쓰레기통에 버렸을 때 이청준은 자기가 버려진 듯 비참한 심사가 됐다. 가난과 어머니는 이청준 문학의 숨은 씨앗이었다. - 인용 -
이 글을 읽는 순간 나는 그만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해지고 말았다.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지만 그 비참한 심사가 창작의 씨앗이 되었다하니 갑자기 작가의 글들이 읽고 싶었다. 아니 꼭 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책장을 찾아보니 ‘꽃 지고 강물 흘러’ 책이 우선 눈에 보인다. 지인에게서 받은 책으로 진즉 읽었지만 별다른 기억이 나지 않으니… 대충 다시 한 번 훑어본 후, 더 읽고 싶은 마음에 서점에 가서 고른 책이 ‘선학동 나그네’ 였다.
단편모음집이었다. 표제작 <선학동 나그네>를 비롯해 <지관의 소>, <매잡이>, <문턱> 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작가의 또 다른 책 ‘꽃 지고 강물 흘러’ 역시 단편모음집이다. 수필인 듯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의 작품을 두루 접할 수 있으니 무언가를 알고 싶고, 읽고 싶은 욕구를 채워주는 그런 책읽기가 아닐까 한다.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는 겨우 49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이다. 하지만 그 안에 품은 뜻은 장대한 소설임에 틀림없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 소설은 서편제의 후속이랄 수 있을까? 서편제가 그 제목 그대로 영화화 되었다면 이 작품은 ‘천년학’ 이라는 제목으로 또 다른 영화가 되어 유명해진 소설인데 여태 진본을 읽어보지 못한 채 줄거리만 꿰뚫고 있었을 뿐이다.
선학동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자태, 그 자태가 물에 비칠 때면 영락없는 학의 모습이 된다는 느낌을 비상학이라는 형상으로 풀어 나가며 그에 한을 실어 표현한 글이라 하고 싶다. 마을과 산,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한 이야기. 자연 속에서 인간의 심성을 끌어내는 그 뜻이 참으로 애잔하게 다가온다.
한 남자가 마음에 품은 한을 안고 30여 년 전에 떠난 선학동을 찾아온다. 선학동은 "포구에 물이 들어오면 마을 뒤의 관음봉이 한 마리의 학의 모습이 되어 날아오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마을은 이미 옛 모습을 잃고 있었다. 포구가 사라지고 들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으로 찾아온 마음은 한을 더욱 끌어 안아야했다. 어슴푸레한 기억을 갖고 주막집을 찾았고 그는 그곳 주막집 주인에게서 자신이 찾고자하는 사람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와 그리고 배 다른 누이였다.
배 다른 누이는 앞을 보지 못한다. 볼 수 없음을 소리를 통해 볼 수 있도록 아버지에게서 소리를 배운다. 누이는 마음에 품은 한을 소리로 승화시켜 내는 간절함이 있으니 사람들은 그 소리에 저절로 젖어든다. 볼 수 없음은 앞을 내다보는 예견까지도 지닐 수 있는 것일까. 선학동을 떠났던 누이는 아버지의 유골을 안고 딱 한번 선학동을 다시 찾아온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유골을 선학동에 묻기 위해서였다. 그 때 누이는 배 다른 오빠가 자기들을 찾으러 이 선학동에 찾아 올 것을 알고 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한을 승화시켜 누이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볼 수 없기에 변화된 풍경이 아닌, 예전 그대로의 풍경을 보며 소리를 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누이의 소리는 절절함으로 들린다. 누이의 소리를 들으며 마을 사람들은 예전처럼 마을을 품고 있는 학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을이 명당임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나는 문득 그 소리에는 작가가 어릴 적 느꼈던 비참한 심사가 녹아있는 한이 서려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작가는 그 한을 이렇게 문학으로 승화시켜 표현 했다는 믿음이 강하게 밀려온다. 작가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글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작가의 한을 생생히 품고 있는 책의 모든 글자 하나라도 놓칠까 아까워하며 남은 글들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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