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은 짧을 것이라는 예보를 맞추기라도 하듯, 9월이 시작된 지 열흘이 지났을 뿐인데 이른 아침의 기온은 선득함을 보내온다. 거미들도 집짓기를 주춤하는지 거치적거리지 않으니 오솔길 걷기가 한층 수월하다. 계절의 변화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행동의 변화를 유도한다. 지난봄에는 새소리를 반겼고, 무더운 여름날에는 줄기차게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벗 삼았는데, 이제 가을이 되니 풀벌레소리가 요란하다. 겨울이 되면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니 계절 따라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내 마음이 활짝 열린다.
간 밤 잠깐 비가 지나갔는지 초목들이 젖어 있고 공기는 착 가라앉아 있다.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매미 울음소리는 뚝 그쳐있고 풀벌레 울음소리들이 가득하다. 가을로 접어드는 요즈음의 짝을 찾는 그들의 울음소리는 고요를 더욱 부추기며 나를 끌어들인다. 내 귀가 멍해지도록 가득한 풀벌레 소리에 문득 아름다운 선율 한 자락이 흐르며 은은한 조명등이 비추이는 연주회장이 떠오른다. 옛 사람은 가을은 하늘의 별다른 가락이라고 했다.
이 계절은 분명 하늘의 별다른 가락을 연주하는 자연 교향악단 이다. 오솔길 양편의 풀숲에서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는 나로 하여금 음향이 좋은 연주회장에 앉아 있는 느낌을 선사한다. 나는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며 하나씩 연주자들을 그려본다. 내 오른쪽의 풀벌레들은 첼로와 콘드라베이스 연주자들이고, 왼쪽의 풀벌레들은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자들이며, 우뚝우뚝 서있는 나무들은 플롯,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의 관악기 연주자들이 되기도 하며, 내 발 밑의 자갈들은 타악기가 되어 내 발끝의 지휘에 따라 연주한다.
아 그렇네! 습관처럼 들고 나온 나무스틱은 그대로 지휘봉이 되니 나는 영락없는 지휘자가 되었다. 아, 그래! 나는 지휘자야! 내 지휘에 따라 그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연주를 하고 있다.
츠츠츠츠츠, 치이익 치이익 뚜르뚜르, 뚜르뚜르, 뚜르뚜르,
여름동안 무성하게 싹을 피워 올린 길섶의 국수나무들은 둥글게 제 몸을 감아 하프가 되어 연주를 한다. 흐릿함 속에 들려오는 감미로움에 신이 난 나는 내 멋진 지휘봉으로 소나무 잎을 살짝 치며 신호를 보낸다. 소나무는 잎에 매달린 작은 물방울들은 통통 튀며 피아노 연주를 스르르 몸짓과 함께 한다.
아, 저 싸리꽃잎에 달려있는 물방울들… 그 뭐지? 맞아 실로폰이야. 실로폰은 지금 맑은 소리를 들려 줄 차례를 기다리며 준비하고 서있다. 금방이라도 물방울 떨어뜨리며 소리를 낼 것 같은데 나는 살짝 윙크로 신호 보내며 조금 기다리라고 하였다.
갑자기 트럼펫 소리가 들린다. 구구구구… 나는 깜짝 놀라며 바라보는데 아, 산비둘기 한 마리가 자기도 연주에 끼워 달라며 커다란 파란색 나팔꽃 트럼펫을 들고서 치근대고 있다. 아마 관중들은 트럼펫이 느닷없이 끼어 든 것을 잘 모를 거야. 비둘기 트럼펫 연주자를 이따가 혼내 줘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나팔꽃이 환히 웃으며 나에게 애교를 부린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나팔꽃의 부스스한 모습이 밤새 연주회 연습을 했을까 조금은 피곤해 보이지만 더없이 예쁘기만 하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저 산 아래의 조명들도 이 연주회장의 모습이 궁금한 듯, 간혹 나무줄기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엿듣기도 한다. 부드러운 바람 한 줌은 이 멋진 연주회에 심취하다 깨어난 관객인 듯 휙 스치며 박수갈채를 보내주고 있으니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의 연주회장인지!! 그 중 제일인 것은 단연 멋진 지휘봉을 든 지휘자이라고 치켜세워주니 난 그만 눈물이 날 듯 하다. 나는 그들이 깊숙이 담고 있는 말들을 알아채고 지휘를 했을까. 한없이 부족하기만 한 나인데도 이 작은 산이 가진 온갖 것들의 축복을 받으니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충만함이 가득 차오른다. 나만의 고요함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빚어지는 더없는 값진 선물을 받았다.
사물이 전해주는 느낌을 받아 글을 쓰고 싶고, 그림으로 그리고 싶고, 사진으로 교감을 나누고 싶고, 때론 오늘처럼 음악으로 들을 수 있음은 모두 내 삶에 활력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내가 나를 지휘한 멋진 날이었다. 내 남은 삶도 멋지게 지휘할 수 있기를 내 받은 선물위에 가만히 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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