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나무숲길을 빠져 나가니 금강교가 보인다. 이 또한 나에게는 낯설음이다. 주차장과 월정사를 이어주는 다리이며 다리아래의 금강연의 물빛이 참 고왔다. 월정사! 절이 많이 커졌다. 그 옛날 내가 다녀갔을 땐 적광전과 9층탑만 있었을 뿐인데, 하여 외로웠지만 참한 자태가 더욱 고즈넉하였는데… 여기저기 증축한 건물들에 조금은 산란했다. 한국전쟁 중에 전소된 건물들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조금은 아쉬웠다. 아마도 스님들과 신실한 불자들의 자동차들일까. 절 깊숙이 들어와 절 특유의 고즈넉함을 빼앗아 갔다. 그나마 작은 다람쥐가 내 앞을 가로지르며 재롱을 부리니 이곳을 찾은 나를 알은체 하는 것 같아 반갑기 그지없다.
주차장과 월정사를 이어주는 다리 '금강교'
금강교 아래의 '금강연'
몇 개의 문을 지나 올라서니 아! 적광전이 보인다. 다행이었다. 그 옛날의 그 분위기가 이 곳 만큼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석가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국보 제48호인 높이가 15.2m인 이 구층 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이라고 한다. 적광전 뒤의 반원형 산 능선은 내 기억에 뚜렷한데 여전한 모습에 반가움이 일렁인다. 내가 사진을 찍었던 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저 건물이 있는 자리였는데… 몇 번을 둘러보며 내 흔적을 찾아보았다. 어쩌면 그러한 추억이 있어 더욱 그리움이 살아 있는 건 아닐까. 그 그리움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함일 수밖에 없다고 참하게 앉아있는 적광전이 일러준다.
월정(月精)사라는 이름을 확인이라도 시켜줄 듯 낮달이 하양게 산마루에 걸려있었다.
유난히 또렷한 기억으로 떠오르는 월정사의 8각 9층 석탑은 여전히 제 모습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탑을 세운 고려시대 당시 9층 높이는 오늘날 63빌딩만큼이나 높은 높이였다 하니 그 특별함에 보고 또 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몇 백 년을 지나오며 많은 부분이 훼손되긴 했지만 형태는 원형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니 새삼 감사함이 느껴진다. 8각 귀퉁이마다 달린 풍경은 원래 72개 였으나 그 중 4개가 소실되어 지금은 68개만 매달려 있다고 한다. 탑이 품은 높은 뜻과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국보 48호가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실한 남김인가!
월정사 경내에서는 탄허스님의 글씨를 전시하고 있었다.
섶다리 (상원사 가는 길의 계곡)
그리움을 확인시켜 준 월정사를 뒤로하고 상원사로 향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는 약 10km, 걸으면 3시간이 넘는 시간이란다. 선재길이라 명명한 아름다운 이 길만을 걷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는 비로봉을 오르는 일정이라 상원사 까지 차를 가지고 올랐다. 울창한 산능선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계곡 옆의 길을 달리는 기분은 그냥 좋았다. 좋다라는 표현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을까. 차오르는 충만함은 침묵으로 이어졌지만 서로가 공통된 침묵이기에 마음만은 함성으로 가득 찼다.
한참을 풍경을 눈에 담으며 서서히 나아가는데 이정표 하나를 만났다. 왼편 오솔길을 따라가면 오대산사고지라는 이정표였다. 원래의 계획은 비로봉을 다녀와서 가 보기로 했는데 예정보다 이른 시간이어서 사고지 먼저 다녀오기로 하고 차의 방향을 돌렸다. 비포장도로의 좁은 길이었지만 매미울음소리와 계곡물 소리가 길 안내자가 되어주니 더없이 좋기만 하였다. 얼마쯤 오르니 아담한 건물의 지붕이 보인다. 지금의 건물은 복원된 건물이지만 원래 그 모습 그대로라니 나는 충분히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 아침 햇살이 깊숙이 들어오니 옛 기운이 한층 더 빛을 발한다.
오대산사고
이곳은 물, 바람, 불이 없는 명당자리란다. 기록물을 보관하는 곳을 이리 깊은 산 중에 만든 이유는 처음에는 실록을 교통이 편리한 지방 중심지에 보관했으나 임진왜란 후에는 전쟁, 화재, 도난의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험준한 산지로 장소가 변경되었다고 한다. 서울의 춘추관을 제외하고 강화도 마니산, 평안도 묘향산, 경상도 태백산, 강원도 오대산으로 실록은 분산 배치되었다고 하니 나는 그 중 오대산 사고를 찾아 본 것이다.
오대산사고본은 1913년 초대 조선 총독에 의해 조선 지배를 위한 연구의 목적으로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겨진 후, 1923년에 관동대지진의 화재로 대부분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원래 오대산사고본은 모두 787책이었는데 그 중 당시 개인에게 대출 중이었던 74책만이 겨우 남았으며 동경제대가 불에 타 버리니 둘 곳이 마땅치 않자 이 74책 중에서 27책은 서울의 경성제국대학으로 돌아왔고, 나머지 47책은 돌아오지 못한 채 일본에 남아 있다가 93년 만인 2006년 7월 14일에 전 국민의 관심과 적극적인 환수운동으로 마침내 우리나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이렇게 남은 오대산사고본은 국보 제 151호이자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의 한 부분이므로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화재인 것이다.
사고 안은 텅 비어 있다.
이층을 오르는 계단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자랑스러웠다. 기록은 단순히 지나간 일을 적는 것이 아니다. 기록은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귀한 자료임을 이 사고지를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느껴 본다. 사고 뒤로 역시나 복원된 수호사찰 영감사가 있었다. 뜰? 아니면 마당일까? 단정하게 손질된 화단의 백일홍이 유난히 크고 탐스러웠다. 이 사고지만큼은 앞으로 영원히 보존될 수 있도록 꽃을 보며 기원해 보았다.
오대산사고지에서 만난 꽃
벌개미취(월정사)
각시취
어수리
영아자
?
백일홍
과꽃
배초향
컴프리
더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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