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 소백산 아래 정겹게 자리 잡은 경치 좋은 곳!
이곳은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곳이었다. 일찍이 조선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은 정감록에서 어지러운 세상 피난처로 첫째로 꼽았던 곳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세를 살아가는 나는, 인삼이 많이 나고 질 좋은 인견이 비싼 값으로 거래되는 곳쯤으로 알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동(강원)과 영남(경북)과 호서(충북)를 이어주는 요충지인 풍기, 영주지방은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이라 일컬을 만큼 역사적으로 굵직한 자취를 남긴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도 소백산의 기상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소백산 기슭에서 태어난 인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꼽는다면 아마도 고려 충렬왕 시절의 훌륭한 학자 회헌(晦軒) 안향(安珦) 선생일 것이다.
730여 년 전 풍기에서 태어난 선생은 64세에 세상을 하직할 때 까지 학자로, 명관으로 업적을 남기셨으며 무엇보다도 교육자로서의 공이 지대하였다. 이렇게 업적이 훌륭하신 선생을 모시고자 세운 서원이 소수서원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라는 데에 의미가 자못 깊기만 하다.
안향 선생의 탄생 200년 뒤, 조선 중종 37년(1542년)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안향선생이 태어나 자란 이곳에 선생을 기리고자 처음엔 사당으로 세웠으나 1543년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그 후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조정에 건의,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게 되었다. 사액서원이란 임금이 친히 이름을 짓고 친필의 현판을 하사 받은 사원을 말한다. ‘소수’란 말은 ‘무너진 학문을 이어서 닦는다’ 란 뜻으로 안향의 위대한 정신을 집약한 것이라 한다.
그 당시 서원은 강학과 제향을 행하는 곳으로 소수서원은 안향선생을 시초로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네 분의 제사를 지냈으며 지금도 봄, 가을에 두 번 예를 행하고 있다한다. 또한 소수서원을 거쳐 간 4,000여명의 인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조금 늦은 오후, 역사적인 소수서원을 들어서는 순간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었다.
소나무 숲 속의 꽃 범부채
소수서원 경내에는 300년에서 길게는 천년 가까운 적송 수백그루가 서원을 에워싸고 있었다. 겨울에도 푸름으로 추위를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참선비가 되라는 의미로 세한송(歲寒松) 학자수(學者樹)라고 불렀다 한다. 소나무 껍질이 거북이 등껍질을 닮았다고 구피목이라고 한다.
소수서원 정문에 들어가는 길
원래 이곳에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숙수사’ 란 절이 있었다고 한다. 세조 3년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순흥도호부가 폐부되면서 소실되었고 그에 유일하게 남은 당간지주라고 한다. 수령 500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소수서원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취한대 퇴계 이황선생이 臺를 세웠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무너진 것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취한이란 뜻은 푸른 산기운과 죽계의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이란다. 취한대 옆의 바위에 새겨진 ‘敬’ 글씨는 풍기군수 주세붕이 서원을 세운 뒤 새겼다고 한다. 글씨가 붉게 칠해진 이유는 단종복위가 실패하면서 그에 가담한 백성들이 참절을 당했으며 그 시신들이 죽계천에 수장 된 바, 그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 붉은 칠을 했다고 한다. 그 위에 하얗게 새겨진 ‘백운동’ 은 퇴계 이황선생의 글씨로 전해오고 있다. 소수서원의 큰 문 '홍전문' 경렴정 1543년 주세붕선생이 세운 정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정자로 품격이 높은 정자라는 뜻이란다. 현판은 고산 황기로의 글씨인데 스승인 퇴계 선생 앞에서 떨리는 손으로 썼다고 한다. ‘정’ 자의 치켜 올린 꼬리부분이 원래 용트림하는 모습이었으나 일제 제국주의자들이 우리의 기를 꺾는다며 글씨 꼬리를 잘랐다고 한다. 나 원 참~~ 정자의 옆 은행나무 역시 수령 500년 이다. 성생단 안향 선생의사당에 제사를 지낼 때 제관이 몸가짐을 재계한 후, 제물을 잡았던 제단터라고 함 강학당 유생들이 모여 강의를 듣던 곳 사방으로 툇마루를 둘러놓고 배흘림기둥양식이 특이하다. 처음 백운동서원이라 하였으나 훗날 소수서원이 되어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학구재, 지락재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 직방재, 일신재, 학문을 통해 인격과 행동을 올바르게 잘 닦는 것이 선비의 자세 행실이 올바르면 인품도 올바르게 직방으로 갈고 닦아야하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 직방의 반대가 건방이라니 아, 정말 그렇구나를 느꼈다. 일신재는 훗날 직방재 옆 산방을 늘려 지은 건물이라 함. 일영대 해의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재던 일종의 해시계 전사청 제기 등을 보관하던 곳, 제사 때 제물을 마련하던 곳이기도 하다. 영정각, 네 분의 영정을 모신 곳 정료대 밤에 정사를 논할 때 관솔불을 피워 뜰을 밝혀주던 대. 장서각 소수서원 경내를 이어주는 아담한 문 사료관 약수, 선비의 맛이란다. 문성공묘 안향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 후에 안보, 안축을 배향한 후 주세붕을 추배하여 현재 네 분을 함께 모신다고 한다. 참고로 왕들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이 ‘종묘‘ 이고 이순신장군을 모셔 놓은 곳이 ‘현충사’ 이다 ‘묘’와 ‘사‘의 품격의 차이는 이토록 클진대 안향의 사당을 ‘문성공묘’ 라 함은 그 당시의 안향선생의 사회적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아담하고 아늑하게 꾸며진 서원의 경내는 엄숙함 보다는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서원 앞에서 소나무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소백산을 오르기로 한 날, 그에 앞서 소수서원을 찾았다. 소백산으로부터 이어져오는 죽계구곡을 따라 걸으며 우리의 훌륭하신 선조들의 깊은 뜻을 이렇게나마 느낄 수 있음에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그 정신과 얼이 길이 빛나 후손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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