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이 잘랑거리던 지난 가을 어느 일요일 오후, 날씨가 풍기는 매력에 이끌려 뒷산을 올랐다. 나뭇잎 새로 떨어지는 가을햇살은 마술사라도 되는 양 오솔길위에 가지각색의 무늬들을 수놓으며 놀고 있었다.
햇살 아래 초목들은 숙살되느라 버석거리는 모습으로도 제 역할을 디하고 있었다. 약간 서늘함을 담고 있는 가을 햇살에 내 마음도 덩달아 숙살되며 쓸쓸함을 이기며 걷고 있는데, 오솔길가의 한 무더기 풀의 풍성함이 눈에 들어왔다. 가는잎그늘사초였다. 여름날에는 치렁치렁한 머리칼처럼 윤기 자르르 흐르던 잎줄기들은 어느새 브릿지를 넣은 듯 금빛줄기들이 섞여있었다. 탐스러움은 여전한 채 가을 햇살을 듬뿍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문득 어렸을 적 소꿉놀이 하면서 풀각시 만들던 그 때가 떠올랐다.
그냥 길가에 아무렇게 자리를 잡고 앉아 그 사초잎들을 손으로 몇 번 빗어 내린 뒤 땋기 시작했다. 참으로 부드러운 촉감이었다. 내 등 뒤로 내리꽂히는 햇살이 마냥 안온함을 안겨 주던 그날, 나는 그렇게 풀각시를 만들어 놓았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면서 눈에 보일 때마다 나는 눈인사를 나누며 그 모습을 바라보곤 하였다. 한 겨울, 눈이 많이 내린 날에는 눈 속에 파 묻혀 있음을 손으로 눈을 헤쳐 주며 얼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깊은 생각에 빠져 지나쳐 오기라도 한 날은 그 자리에서 뒤돌아보며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함을 건네고 했었다.
겨울 지나 봄이 되어 새싹들이 돋고 꽃들이 피기 시작할 무렵 난 지독한 감기로 산행을 놓치고 지났다. 감기가 거의 나아갈 무렵, 열이틀 만에 산을 오르니 모든 것들이 반가움으로 나를 맞이하는 것 같았다. 상쾌한 마음으로 댕기머리 옆에 다가선 나는 그만 깜짝 놀랐다. 땋아 내린 머리를 그대로 놔둔 채, 정수리 부분에서 새 잎이 돋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예뻤다. 나를 만나려고 예쁘게 단장한 모습이었을까. 새로 돋은 가녀린 싹의 연한 부드러움이 그대로 내 마음 안으로 적셔진다.
한 순간, 연한 부드러움으로 찰랑대는 마음은 기억 저편 아스라한 추억으로 건너간다. 잃었던 소중한 보물을 찾은 듯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번져간다. 우리 어렸을 때의 놀이터는 동네 고샅이거나 들판 양지바른 나무아래이거나 하였다. 여자이이들은 주로 소꿉놀이를 했다.
장난감들은 앉은 그 자리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토끼풀로 시계를 만들었고, 돌돌말린 패랭이꽃 봉오리는 입술연지가 되었다. 넓은 토란잎은 우산이 되었고 옴팍한 청미래덩굴 잎은 그릇이 되었다. 작고 고운 열매들은 밥이 되고 반찬이 되었다. 깨진 사금파리는 훌륭한 살림살이가 되었다. 그 중에 으뜸으로 주인공 노릇을 하는 풀각시가 있었다. 풀각시를 만들어 놓고 심부름도 시키고 시집도 보내고 잠을 재우기도 하며 놀았었다.
소꿉놀이에 지치면 우리는 시합을 하곤 하였다. 납작 둥근 돌멩이는 비석치기에 좋았고, 길고 짧은 막대기로 자치기를 했고 이기고 지는 놀이를 하느라 해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 모두는 우리의 추억창고를 채워주었으면 알게 모르게 우리 신체를 균형 잡히게 한 훌륭한 운동이었다. 모두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물건들을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았다.
이제 사라져 버린, 그래서 더욱 그리운 것들이다. 요즈음 우리 아이들은 자연을 보고도 놀이감으로 만들 줄 모른다. 아니 애초부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방에 앉아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노는 것이 일상화 되었다. 얼굴도 모르는 상대방과 게임을 하기 일쑤다. 순간적인 재미는 있겠지만 남는 건 외로움일 것이다. 서로 눈을 마주보고 가슴으로 통하는 즐거움을 만날 수 없다. 밀치고 밀어내며 스치는 감성을 느낄 수 없다.
오늘 이렇게 지난 가을에 땋아놓은 댕기머리 풀각시를 바라보노라니 이런 자연의 놀이감을 요즈음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숲과 나무를 바라보고 그들의 특이함을 내 것으로 취하여 만져보는 것은 내가 자연을 만지는 것이 아닌, 어쩌면 자연이 나를 보듬어 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요즈음 아이들도 그렇게 보듬어 줄 때의 안온함을 느끼며 신바람에 설레는 마음을 지녀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램이 가득 고여 온다.
나만의 작은 희망을 안고 발맘발맘 걷는데 또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온다. 어쩜 길가에 드러난 나무뿌리를 붙잡고 가는잎사초가 자라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진다. 아, 남자 떠꺼머리총각이네!! 내가 만든 풀각시는 여자하고, 이 떠꺼머리는 남자 시키면 되겠네! 나 혼자 숲의 친구들을 모아 놓고 소꿉놀이를 한다. 나는 지금 순간 아이가 되어 소꿉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천지가 내 놀이터고 장난감으로 가득한 봄 날 이른 아침이다.
새 친구가 된 떠꺼머리 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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