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 20여일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감기가 잦아졌지만 그 시간은 나에게 봄빛을 가져가기도 하였다. 만나지 못할 봄이라면 성급함 없이 이 봄을 그냥 마음 안에만 담아두기로 애써 태연한 척 했다. 감기 끝자락이 몸에 매달려 달랑거릴 즈음 기어이 산을 올랐다. 4월의 바람이 왜 이리도 차갑단 말인가. 봄을 만나러 가는 내 옷차림은 겨울이었다. 두꺼운 패딩 잠바와 마스크에 털장갑을 꼈다.
산 초입에 들어서는 순간, 참으로 안온한 느낌이니 편안한 친정에 들어선 것 같은 좋은 기분이다. 호랑지빠귀새가 휘익 하며 환영의 인사를 한다. 어딘가에 앉아 있던 꿩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꿩! 꿩! 하며 날아오른다. 알맞은 높이의 나무위에 앉은 이름 모를 새는 대문까지 신발 끌고 나오며 반기는 모습인 듯 지척의 거리에서 높은 톤의 목소리로 우지진다.
간밤의 작은 비에 촉촉이 젖은 오솔길은 부드러움으로 내 발을 받아들인다. 길 위에는 벚나무들이 떨어트린 꽃잎들로 카펫을 깔아 놓은 듯싶으니 나는 꽃길을 걷고 있다. 아마도 이 꽃길을 만드는 데는 바람도 한 몫을 했을 터이다. 또한 연초록 잎에 자리를 내 주기 위해 꽃들 스스로 바람을 붙잡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솔길가의 국수나무들도 수수한 아주 작은 꽃과 연한 연둣빛 잎을 피워 올리며 꽃길을 장식하고 있었다.
길가를 수놓은 듯 잔잔하게 무리지어 핀 제비꽃들의 청순함! 부끄러운 듯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내가 부끄러워야 할 순간인데… 나무 밑둥치에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는 철쭉은 지난밤 숲의 요정이 꽃꽂이를 해 놓은 듯 가지런히 피어 있다. 이제 막 새 연초록 잎을 피워내는 나뭇가지들은 제 멋대로가 아닌 알맞은 몸짓으로 조심스럽게 뻗어내고 있었다. 자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움에는 우리는 영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 같은 섭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얼마나 다정한 몸짓들인가.
어쩜 내가 오지 못한 동안 숲의 친구들은 그동안 나를 기다리며 환영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내가 할 수 없었음에 작은 희망마저 놓아버리고 체념을 앞세웠던 나에게 이토록 활기를 넣어주는 숲속 친구들! 나를 기다려 주지 않을 거란 나만의 생각에 어느새 연둣빛이 칠해지고 있다.
그들은 진정 나를 기다려 주지 않고 조금씩 시간을 따라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만이 품고 있는 금쪽같은 진리는 조금도 낡거나 빛바래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몸이 안 좋다는 나약함으로 쉽게 타성에 젖어버린 나, 열이틀 만에 오솔길을 걷는 나는 어느 것 하나 무심히 지나 칠 수 없는 시린 가슴이다. 오늘 한 순간에 다 담아두지 못할 것이다. 천천히 하나하나 깊은 마음으로 겉 넘음 없이 음미하고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만치 산등성에 이파리와 꽃이 무성한 낯선 모습이 보인다. 눈을 고정 시켜 바라보는 순간, 나는 그만 발을 멈추고 세상에! 라는 놀라움의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무언가가 뭉클함이 내 안을 휘젓고 나아간다. 누운 산벚나무였다. 이 맘 때쯤이면 무수한 꽃잎으로 나의 오솔길을 꽃길로 만들어 주던 나무였다.
지난 여름 볼라벤 이라는 태풍은 유독 나무들을 많이 쓰러트렸다. 우리 뒷산도 예외가 아닌 듯 피해가 많았고 지금도 그 흔적들이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숲이 우거지면 조금은 감추어질까. 그 어수선한 모습들이 못내 아쉽고 서운 했었다. 특히나 이 산벚나무는 수 십 개의 줄기가 한 나무처럼 한자리에서 한뿌리로 서 있었으니 언뜻 보면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로 보였었다. 그 무게를 감당치 못했을까. 태풍에 온전히 뿌리를 하늘로 향한 채 그만 눕고 말았었다.
그 모습을 대하는 처음 순간에는 퍽이나 무서웠다. 그 옆을 지나치는 것만으로도 내 행동이 불경스럽게 여겨졌다. 흙덩이에 엉긴 뿌리들이 화가 많이 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무서움이 차츰 사그라지면서, 나무의 고통도 점차 잊혀 지면서 이제는 스스럼없이 옆을 지나가게 되었고 언제부터인가는 바라보지 않고도 지나게 되었었다.
그렇게 여름을 나고 가을, 겨울을 지났으니 나는 그 나무가 당연히 죽었으리라 생각을 하고 그렇게 믿어 버렸다. 그런데 지금 저 나무는 그렇게 누운 채로 꽃을 피우고 잎을 내고 있었다. 참으로 경이로웠다. 순간 와불이 떠올랐다. 분명 저 나무는 부처님이셨다. 누운 부처님~
일찍이 법정스님은 절에는 만든 불상만 있으며 진정한 부처는 이 세상 속 천지에 다 있다고 하셨다. 내 마음이 천당이고 지옥이라 하셨다. 누운 나무는 분명 자신이 처한 현실을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체로서 행복함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그 마음은 저절로 누워서도 바르게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을 것이니 그 마음이 온전한 꽃으로 피어났으니… 아, 나는 진정한 부처님을 만났다.
말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였지만 나무는 스스로 체득한 삶의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삶의 희망을 놓지 않고 어떻게든 역할을 다 한 뿌리의 힘은 우리 모두의 화신이었다. 누워서도 나를 가르치는 나무! 내 사는 동안 무엇을 힘들고 어렵다 할 수 있을까. 참으로 신선한 몸짓을 마음 가득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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