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붓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봄비 자근자근 내리는 날이다. 한 해의 첫 계절 봄이 어느새 성큼 내 곁에 서 있음이 이제야 느껴지니 느긋한 마음으로 계절의 여운을 느끼고 싶어진다.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길목에서 한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우리 인간사는 따라가기에 숨이 차다. 나에게 맡겨진 일들 역시 어서 빨리 마무리 해 달라고 연실처럼 풀어내며 내 정신을 끌어가니 봄을 느낄 겨를이 없었나 보다. 지나는 세월 속에 내 지난 허물을 털어 버리지도 못하고 허둥댔지만 얼추 밀린 일들이 끝나서일까 커피 한 잔이 간절히 생각난다.
커피 한 잔을 들고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쌓였던 근심이 스르르 풀어지며 마음은 한없이 부드러워지고 풍족해진다. 나의 자잘한 근심을 싹 거두어가는 풍경들은 어쩌면 그대로 내 마음의 망우경이다. 근심을 잊는 풍경은 진정 찻잔의 받침으로 망우대가 되고 있었다. 우리의 조상님들은 자연을 벗 삼으며 마음을 나누는 다감함을 지녔을까. 망우초가 있고 망우대가 있으니 말이다. 풀 한 포기에도 마음의 근심을 잊고, 작은 접시 하나에도 근심을 담아내는 옛 사람들의 정서는 지금을 살아가는 나의 것일 수도 있다.
망우대는 찻잔의 받침에서 나온 말이다. 조선 중종의 시기에 만들어진 지름의 크기 16cm의 잔 받침은 보물 1057호로 지정 되었다. 이 작은 접시가 보물로 지정된 연유는 잔 받침 한 가운데 쓰여 있는 망우대(忘憂臺)라는 글자 때문이라 한다. 근심을 잊는 받침이라니 얼마나 멋진 말인가. 차 한 잔을 마실 때에도 찻잔만을 달랑 드는 경우와 받침이 있는 찻잔을 드는 경우의 마음은 확연히 다르다. 잔 받침이 있으면 더욱 공손해지고 조심스러워지는 마음이다. 그에 근심을 잊는다하니 세상에 둘도 없는 명약으로 우리 선조들의 멋과 여유를 겸비한 풍유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근심을 잊게 하는 받침은 접시가 아니어도 좋다. 그날그날의 풍경이 빚어내는 그림 한 조각을 떼어다 내 손에 들려있는 찻잔 밑에 끼워주면 그대로 망우대가 되는 셈이다. 잊어버린 근심들, 차마 멀리 달아나 버릴까. 다만 가려질 뿐이지만 한숨을 받아내는 큼지막한 망우대는 나를 밀어내지 않는 참 좋은 친구다.
맑은 날은 늠름한 눈부심으로 망우대가 되어준다. 늠름함은 의젓하고 당당함이다. 조금은 천연덕스럽기도 하다. 우리 작은 아이가 어렸을 적, 어디서 누구한테서 배웠는지‘늠름하다.’라는 말을 곧잘 하였다. 그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한 번씩 하는 말이 어찌나 귀여운지 웃음을 머금으며 아이가 늠름하게 자라주기를 염원했던 것도 같았다. 맑음 속에서 빛나는 초목들의 싱그러움은 내 마음으로 느끼는 늠름한 눈부신 빛이다. 그 눈부신 빛 안에서 내 마음은 늠름하게 근심을 서서히 버리곤 한다.
흐린 날은 그윽함으로 망우대가 되어준다. 흐린 날은 풍경보다도 분위기로 나를 침잠케 한다. 밝음이 아닌 맑음으로 가득한 흐린 날의 투명함에 그윽한 마음이 되어 차를 마시노라면 찻잔에 새겨진 그림이 풍경이 되기도 한다. 찻잔에 따라 꽃 한 송이가 내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때론 기하학적으로 그려진 난해한 그림의 심오함이 내 안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흐린 날은 풍경 아닌 것이 풍경을 만들어주는 음예공간에 깃든 그윽함으로 나의 근심을 풀어낸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은 함초롬함으로 망우대가 되어준다. 사물들은 제각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지 못하고 무덤덤하게 지나침은 되돌아 갈 수 없는 후회를 안겨준다. 그 마음을 깨우쳐 주는 것은 비이다. 모든 초목을 잘게 빗질하여 주니 눈 안에 들어오는 풍경이 함초롬하기 그지없다. 함초롬하다는 말은 젖거나 서려 있는 모양이나 상태가 가지런하고 차분하다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내 마음은 한없이 차분해지며 정갈해진다. 근심 걱정은 차분해진 내 안으로 들어 올 수 없어 주저앉으니 나 또한 함초롬해진다.
눈이 내리는 날은 끼끗함으로 나의 망우대가 되어준다. 끼끗함은 깨끗함을 잘 못 쓴 말이 아니다. 깨끗함에는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지만 끼끗함에서는 생명력을 함께 느낀다. 끼끗함은 생기가 있고 깨끗하다는 말이니 깨끗한 모든 것을 품고 있는 품 너른 정갈함이다. 눈이 내리면 생동감이 느껴진다. 아마도 허공에서 제각각 빙그르 돌며 눈의 여왕을 꿈꾸는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복하게 쌓여있는 모습에서는 단정함과 깨끗함을 느낀다. 눈이 내리는 날은 어쩌다 만나는 반가운 날이다. 끼끗함으로 만나는 반가움에는 근심 아닌 순하디 순한 웃음만이 있을 뿐이다.
안개 자욱한날의 안개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겨를이 되어 망우대가 되어준다. 자욱함으로 만들어지는 겨를 안에서 나는 무한대의 상상력을 가진다. 겨를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생기는 틈이 아니며 일부러 시간을 나누어 챙기는 여가도 아니다. 내 주위에 늘 있는데도 마음이 없으면 만나지 못하는 빈 공간이다. 이때의 빈 공간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가득 들어 있는 충만한 곳이다. 이른 아침 오솔길에 꽉 찬 안개 속에는 수염 하얀 산신령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봄이 시작되어 피어나는 생강나무 꽃은 노랑이 아닌 연둣빛 노랑임을 선명히 보여주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런 안개너머 풍경을 시각으로 감흥을 느낄 수 있음은 내 마음으로 겨를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마음이 녹아나는 그 겨를에는 근심이 자리할 틈이 없음은 물론이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계절의 풍경은 내 찻잔의 망우대가 되어주곤 하니 이들은 모두 내 마음의 보물 일호이다. 날씨에 따라 변하는 나의 망우대는 제각각 지닌 불변의 모습으로 때에 맞춰 나의 근심을 씻겨주고 있으니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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