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으로!!

단상(短想)

나만의 세한도

물소리~~^ 2012. 12. 20. 14:20

 

 

 

 

 

눈 덮인 산은 고즈넉했다.

시린 눈을 이겨내기 위해 잔뜩 긴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팽팽한 맑음 속에 긴장감이 감돈다.

숲 속 오솔길위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고요하기 그지없는 눈 내리는 새벽의 오솔길에서는

숲속의 정적, 그 하나하나까지 온몸으로 느껴진다.

흔적 하나 없는 깨끗함은 환한 보름달보다도 더 운치 있는 밝음이었다.

그 눈빛이 얼마나 가슴에 파고드는지…

 

세상이 진공상태처럼 고요함속에 들리는 소리는 너무나 섬세하여

바람 한줄기에 스치는 메마른 나뭇잎 소리마저 투명하게 마음에 스며든다.

나무위에 얹혀 진 눈들이 제 무게를 못 이기어

눈보라를 일으키며 사르르 내려오는 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첼로 음 보다는 낮은, 콘드라베이스 음 보다는 높은 음의 질감은

한없는 푸근함인데 어느 시인은 짓궂게도

이 소리를 나무들이 눈 똥 누는 소리라 했던가.

 

그만, 이 빛과 소리의 여운 속에 그대로 앉아있었으면…

그렇게 종일 있어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으면…

아니 누가 나를 찾는다 하여도 모른척하고

이 어둠도 환함도 아닌 이 빛의 여운 속에

내 몸을 맡기고 그렇게 있고 싶은 마음안에 알 수 없는 슬픔이 차오른다.

눈 덮인 풍경을 우두망찰하고 서서 슬픔의 실마리를 더듬거려 본다.

 

내리는 눈 속에는 소리가 들어있다.

마치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에서

수 십 명의 아이들이 집단무용을 하는 듯 난분분하지만

알 수 없는 질서를 지닌 채 나풀나풀 내려오고 있다.

그 모습 속에는 길게, 짧게 혹은 급하게 울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어 있다.

 

눈 내린 이른 아침 이불속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고 누워 있노라면

쓰윽 쓱, 쓰윽 쓱 긴 싸리비로 마당의 눈을 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어서 일어나라는 아버님의 무언의 목소리였다.

달콤하게 남아있는 이불 밑 온기 속에서

싸리비 자국 따라 발가락을 꼼지락 거릴 뿐이다.

 

눈 속에는 고운 색이 스며있다.

따뜻한 물을 세수 대야에 담아 마당으로 나온다.

손에는 다 쥐어짜고 남은 물감튜브 하나를 들었다.

세수야 고양이 세수하듯 물만 찍어 바르고

물감 튜브를 대야에 풀어 아버지가 쓸어 모아둔 눈 더미 위로 부으면

눈은 사르르 제 몸을 녹여내며 그만 노란 빛, 빨간 빛으로 물들어 간다.

 

내리는 눈 속에는 향기가 스며있다.

눈이 주는 포근함을 즐기며 낮잠에 빠져

빨랫줄에서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해

눈을 맞은 기저귀를 걷어 방안에 들여 놓으면

훈훈함에 스르르 녹아내리는 속에서 아가의 살 내음이 풍겨온다.

 

눈이 지닌 맑음 속에는 맑은 영혼이 들어있다.

그 해 겨울, 내 동생을 떠나보내고

그 애의 사무실에 유품정리를 하러 가는 날, 눈이 내렸다.

차창에 쏟아지는 눈들을 와이퍼가 아무리 쓸고, 쓸고 쓸어도

자꾸만 와서 부딪치곤 하였다.

난 그 모습을 내 동생의 영혼이라 생각하였다.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파

저렇게 애 닳도록 나비되어 날아 와 제 몸을 부딪치며

우리에게 오고자 한다고 생각했었다.

차창도 내 눈도 눈물범벅되어 앞이 보이지 않았었다.

 

아! 그랬구나!

눈이 내려 마음이 슬픈 이유는 맑은 영혼 때문이었다.

첫 눈이 내릴 즈음이면

닦아도, 닦아도 잊히지 않을 나만의 겨울 빛 세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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