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서울로 향하는 고속버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무들은 각기 다른 모습과 서로 다른 빛으로 산야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조금씩 양보하는 둥그런 마음으로 조화를 이루며 함께 어울려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배워 나 또한 오늘 그렇게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주인공이 되고 있으니… 가을은 그렇다. 떠나는 사람을 붙잡고 싶은 마음을 안겨주는 그런 삽상함이 마냥 좋은 계절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생활한 마음들을 글로써 풀어 놓은 공간을 만난 후, 우리는 그렇게 시나브로 조금씩 알아가는 마음이 되었다. 산의 나무들이 사로 다른 모습으로 물들어가면서도 조화로움을 이루듯, 우리도 그렇게 글방에서 뒹굴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곤 하였다. 먼 곳에서 고국을 찾아오신 좋은님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향하는 날이다.
모처럼 운전을 하지 않고 고속버스에 몸을 맡기니 참으로 여유롭다. 이른 아침부터 서두른 일정이어서 차 안에서 눈 좀 부쳐볼까 했는데 정신은 마냥 더욱 또렷해진다. 내가 지금 누구를 만나러가는 길인지… 내가 왜 이렇게 만남에 들떠있는지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지금 다른 고운님들 역시 서로 다른 곳에서 한 점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을 테니 참으로 글의 힘이 크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사이면서도 만나기 어려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 그러기에 문득문득 설렘이 밀려오곤 하였다. 처음 만나는 얼굴에도 스스럼없는 마음이 오갈 수 있음은 글로 통한 마음 길이 있었기에 더욱 설렘이 가득한 만남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약속시간조차 조금치도 어긋남이 없었다. 모두들 더 일찍 나와서 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작 낯설게 다가온 것은 창덕궁이었다. 구중궁궐에 처음 들어가는 궁녀처럼 우리는 잠시 헤맸다. 하지만 우리들의 훈훈한 정에 오히려 창덕궁의 낯설음이 주춤 뒤로 물러선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부터 궁궐안의 주인공이 되어야겠다. 행여 고운님들이 내 마음을 알아챘을까? 나는 오늘 왕비가 되기로 한 마음을… 먼 시대의 시간을 만나는 일은 역사를 만나는 시간이다. 역사는 글의 힘이다. 우리 역시 우리만의 글의 힘으로 오늘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
역사를 배우고 익힘은 옛것을 배우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함이다. 문화는 끊임없이 소멸되고 생성되는 것이다. 그에 옛것에만 안주해도 아니 되고 무작정하고 새로움을 쫓아서도 아니 된다. 무릇 우리가 지녀온 근본을 잃지 않고 옛것에 바탕을 두어 오늘을 변화시켜 나가기 위한 초석이 역사라 말 할 수 있다. 내가 유독 역사를 좋아함은 그 근본의 우월성에 기인하는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로움을 만날 때 마다 난 작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은님들과 걸으며 때로 각자이다가 어느 순간에 한 무리였다가 우리는 그렇게 역사를 만나고 다녔다. 창덕궁은 근엄했고 창경궁은 울창한 숲이 있어 친근하였다. 창덕궁의 후원(비원)은 아름다웠다. 궁궐에 들어왔다고 하여 보고 느끼는 것은 어디 왕과 왕비뿐이겠는가. 그곳에 남아있는 선조들의 자취를 찾아보고 오늘을 읽을 수 있는 작은 마음이 있어 더욱 좋을 것이다.
내 작은 마음을 제일 많이 빼앗아 간 곳은 단연 후원의 규장각이었다. 규장각은 기록문화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조선의 르네상스라 일컫는 정조시대의 산물이다. 정조는 기록문화를 창출하면서 그만큼 투명한 책임정치를 펼친 훌륭한 왕이었다.
좋은님들과 헤어진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난 왕과 궁궐의 모든 것에 관심이 기울고 있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마도 좋은님들과 함께한 감동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서일 것이다. 관심은 용기의 동기부여가 되었다. 좋은님들과 헤어진 2일 후, “광해, 왕이 된 남자” 영화를 보았다. 내가 지니는 관심으로 내가 해야 할 일에 방해되지 않으려 저녁시간대의 상영시간을 택했다.
영화 속 장면은 당연 궁궐이었다. 우리가 골목골목 걸어 다녔던 곳이 나오기도 하였다. 상상 속의 왕비도 만났다. 폭군이라 배웠던 왕의 이면을 파헤치며 긍정적인 역사관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영화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또다시 나의 관심을 끌어낸 것은 기록이었다. 이 영화는 승정원일기에서 지워진 15일간의 내용을 살려낸 것이라고 단순하게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내용을 모르는 15일 간이기에 작가나 누구에게는 충분히 상상의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공백이기도 하다. 그에 알려지지 않은 왕의 선정을 재조명해 준 효과는 자못 지대하다 하겠다. 나 역시도 지워져 알 수 없는 기록에 무한한 관심과 궁금증을 영화 보는 내내 지울 수 없었다.
정말 저런 일이 있었을까. 왕은 결코 제 뜻대로 살아가며 행 할 수 없는 고독한 일인자 이었던 것이다. 창덕궁과 영화를 연계해 보며 내 생각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또 하나의 생각이 내 마음 안에 조심스레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외규장각 의궤(儀軌)를 지금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의궤는 지난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될 만큼의 귀중한 가치를 지닌 역사서이다. 그걸 내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이렇게 중요한 자료일진대 광해는 왜 승정원일기를 지우도록 했을까! 일요일을 틈타 기어이 박물관에 다녀오고 말았다. 필(筆)의 위대함을 만났다.
1776년 경 그림으로 추정되는 '규장각도'
의궤 전시실에서 깜짝 놀란 반가움으로 만났다.
2012년 10월에 내가 바라본 규장각
도록에서 스캔한 '규장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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