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운은 나에게 퍽 익숙하다.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순간에 빚어지는 여명은 낯선 곳에서의 어색함마저 쉽게 길들여주는 편안함이 있다. 큰 숨을 들이쉬며 막 들어선 태백산의 초입에 피어난 보랏빛 쑥부쟁이의 선연한 빛이 내 마음을 환하게 밝혀준다. 외로운 산길에 외롭고 고독했을 법 한데 그 모습 어디에도 그늘진 구석 찾아 볼 수 없는 순수함의 모습으로 나의 그 무엇을 위로해 주는 듯하다. 내 안의 번민과 탐욕들이 없어진다면 나도 이처럼 한 송이 꽃으로 피어 날 수 있을까. 그래서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점점 가빠지는 내 숨소리에는 가당치 않은 욕심이 가득하다.
산길은 계속 이어지면서 슬금슬금 경사를 높여주고 있었다. 큰 숲에서는 풀벌레 소리마저 조심스럽다. 무거운 내 발걸음소리에 그들은 스스로 음의 고저를 맞추며 자신들의 위치를 감추고 있다. 이제 막 비치기 시작하는 햇살이 울창한 나무 숲 그 어느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려는지 서치라이트 비치 듯 길을 찾고 있다.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가녀린 꽃들이 햇살을 받아 찰랑찰랑 투명하다. 이 산은 어느새 가을빛을 옹기종기 모아놓고 내 발길을 붙잡기만 하는데 계속 오르막길만 보내는 산길에 난 멈출 수가 없다. 여행이란 말에는 어딘가 모르게 조금은 낭만적이지만 실제로는 육신을 부리는 수고스러움과 흐르는 땀의 끈적거림이 함께한다. 그러기에 무엇을 새롭게 안다는 것, 볼 수 있다는 열정은 늘 끈적거림을 사랑해야 하는 후텁지근함이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내 눈앞을 휘익 지나가고 날쌘 다람쥐 한 마리가 내 앞길을 겁 없이 가로 질러 건넌다. 고지가 높아질수록 나무들은 제 키를 낮추며 하늘에 순응하고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주는 가을을 먼저 받아들인 잡목들이 차츰 제 몸을 물들이며 계절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내 눈에 차츰 성스럽게 보이기 시작하는 이유는 아마도 오늘 목적지인 태백산의 정상에 천제단을 모셔놓은 민족의 영산인 까닭이리라. 가파르지 않지만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내가 어디쯤에서 쉬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지 않는다. 끝없이 거슬러 오르는 길, 조금만 더 오른 다음에 쉬자고 다짐하기를 수십 번 되풀이 하면서도 정작 몸을 부리지 못하고 이어지는 발걸음을 느닷없이 확 붙잡는 것이 있었다.
우람한 몸통에 기묘한 모습으로 가지를 뻗힌 나무였다. 몸통은 시멘트를 발라 놓은 듯 작은 이끼하나 허락하지 않으면서 가지 끝에는 무성한 나뭇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그 우람함에 무서움이 일었지만 순간 눈꽃나무가 생각나면서 그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주목나무였다. 태백산의 보호수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살짝 몸통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차가움을 연상했는데 은은하게 번지는 따뜻함에 그만 내 마음이 스르르 녹아난다. 이 나무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도 천년을 산다고 했던가? 옆에 서있는 강대나무(서서 죽은 나무)의 모습마저 예사롭지 않다. 덕분에 다리에 쉴 참을 주면서 난 주목나무를 따라 한 바퀴 둘러보며 고개를 젖히고 나무 끝을 바라보는데 새파란 하늘 한 가운데 유독 주목나무의 가지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아, 그렇다! 바오밥 나무가 떠올랐다.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라는 섬에서 자란다는 바오밥 나무!! 신성한 나무로 꼽고 있는 나무중 하나로 나무 윗부분에서만 퍼져 있는 가지가 마치 뿌리 모양을 하고 있어 신이 실수로 거꾸로 심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우리는 흔히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하여 나무가 자란다는 상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바오밥 나무는 뿌리를 하늘로 향한 채 우주의 신비함을 빨아들이며 거꾸로 자라고 있다는 이야기로 신성함을 부여하면서 우리 인간의 획일적인 사고에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바오밥 나무는 그 유명한 어린왕자의 친구이기도 하다. 어린왕자는 자기의 행성이 너무 빨리 자라는 바오밥 나무에 의해 먹혀버릴 것 같은 근심에 바오밥 나무가 자라지 못하도록 이 나무의 새싹을 골라내곤 한다. 우람한 나무의 아주 작은 새싹을 골라내는 정성은 참으로 순수한 마음이다.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여우의 말이 지금 주목나무를 바라보며 생각나는 이유는 나는 지금 이 나무를 바라보며 중요한 것을 바라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무가 보여주는 멋진 외양만 생각하고 눈 내리는 날 그 가지에 살짝 얹힌 눈들로 인하여 환상의 풍경을 보여준다는 모습만 생각하며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주목나무를 통하여 바오밥나무를 떠올리며 신비한 나무의 내면을 알고자 함은 그들이 풍기는 신비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설픈 호기심으로 자연의 심오함까지 겨냥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의 신비함과 혜택을 무시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연과 인간이라는 서로의 경계를 짓고 구분되어 있음은 각자의 내부를 지키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나에게 경계를 짓고 구분 지어야할 신비함은 미지수이다. 그러기에 기묘한 모습을 보여주는 주목나무를 나는 단순성으로 대하고자 한다. 단순성에는 끝없는 상상을 부여할 수 있는 여백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대대손손 무한한 상상력을 심어주는 주목나무이기를 바라니 산중에 있는 이 몸이 절로, 절로 나아간다.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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