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란 지붕을 가진 만대루는 병산서원 전체를 품고 있었다.
청량산에서 내려왔지만 도산서원의 여운에 깊이 빠져 있는 마음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내친김에 또 다른 서원을 찾아보고픈 마음이 일었다. 하여 같은 안동에 있는 병산서원을 내비에 도움을 청하니 1시간 30분 거리에 있다고 알려준다. 두 말 않고 우리는 달렸다. 언제 또 올까하는 마음에서다. 울릉도에 들어가지 못한 채 돌고 도는 여행이 우연찮게 서원 답사가 되었지만 마음에 차 오르는 기쁨은 한량없다.
경북 안동의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의 민속촌이다. 풍수지리가 빼어난 곳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관광명소가 된 곳이다. 이곳 하회마을에는 단체에서 두 번, 가족끼리 한 번, 세 번을 다녀갔다. 하지만 정작 마을을 돌아 자리하고 있는 병산서원은 풍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을 뿐 한 번도 들르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하회의 가치는 병산서원에 더 큰 비중이 있다고 한다. 도산서원이 도산서당을 주축으로 이루어 졌듯, 병산서원은 풍산 류씨 교육기관인 풍악서당을 이곳 병산으로 옮겨 지은 것이라 한다. 당시의 서원은 요즈음의 학원처럼 유행했던 모양이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서원들은 비리도 많았다. 이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모두 없어지고 지금 47개의 서원이 남아있다. 그 중 도산, 소수, 옥산, 도동, 병산서원을 5대 서원 이라 하는데 이 모두 경북에 있으니 가히 이 지방이 선비문화의 주축이라 함에 부족함이 없는 듯하다.
병산서원에 이르는 길은 비포장도로였다. 왼쪽으로 낙동강줄기가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낮은 구릉인 듯, 과수원인 듯, 펼쳐진 사이에 이어진 비포장도로는 비가 와서 엉망이었다. 실망이 크다.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좋지만 포장이 아니라면 마사토라도 뿌려 놓았다면 차가 진흙범벅은 되지 않을 터인데… 하는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이 길을 걸어서 다녔을 텐데 차에 앉아 언감생심 불평을 말하고 있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왜 유명한 곳을 찾아드는 길은 이토록 길게 이어질까. 아마도 그 길을 걷거나 달리면서 오직 찾아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대한 관심을 더욱 깊게 해주기 위함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좁은 길 막다른 곳에 아담한 주차장이 있었다. 주차장 앞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백사장이 좋았으며 낙동강을 감싸주는 산이 있었으니, 그 산이 바로 병산이란다. 잔잔한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몇 발자국을 걸어 오른쪽으로 병산서원에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순간 마음이 푹 가라앉으며 안온한 느낌이 다가온다. 문까지의 길지 않은 길, 양편으로 배롱나무들이 배열해 서서 환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내가 마치 사열을 받는 느낌이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 밖에서 한참을 건물을 바라보았다.
예를 갖춘 후 들어가는 문
조금은 초라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도산서원과 대비가 되어서일 것이다. 도산서원이 의관을 잘 갖춰 입은 선비의 모습이라면 병산서원은 기품이 은은하게 서린 인상의 하얀 수염을 길게 내리고 있는 촌로의 모습이랄까? 조금은 편안한 모습 같았다. 옛것의 푸근함이 스르르 밀려오니 저절로 발걸음이 급해진다.
복례문이란 현판을 달고 있는 솟을 대문을 통해 안으로 긴 시선을 보내보니 이 건물은 대문에서부터 일직선으로 문과 문으로 이어지며 정갈한 느낌이 한 눈에 확 들어온다.
복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가로로 긴 지붕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와! 감탄이다. 그 시대에 이렇게 큰 건물이라니!! 만대루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건물의 의젓함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이어진 계단을 따라 오르니 나는 자연히 만대루의 마루 밑에 서 있었다. 우람한 둥근 기둥들이 뒤틀린 채, 구부러진 채 누마루를 받치고 있었다. 주춧돌 역시 다듬은 것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돌을 이용한 듯 모양이 제 각각이었다. 신비함을 느낌과 동시 한 생각이 머문다.
그 시절 건축 재료를 다듬는 기술이 부족했던 것이 아닌지. 어쩔 수 없이 있는 그대로를 사용하였을 뿐인데 후세인들은 이를 미화하여 자연미의 극치라 해석을 하고 있음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스쳤다. 의아함을 지닌 채, 누마루 밑을 나오는 계단을 따라 오른 나는 그만 훅! 하고 숨이 들이 키고 말았다. 누마루에 오르는 계단을 보았던 것이다. 그 계단은 통나무를 정교하게 깎아 만든 계단이었다. 세상에~~ 이런 정교함이라니.. 몇 번이나 통나무 계단을 쳐다보고 만져 보았다. 기술부족이지 않았을까 하는 나의 억측은 그대로 억측이 되어버렸다.
자연스런 위치에서 자연 그대로 재료를 사용했음은 자연과 함께하려는 지혜였다. 자연을 가져오는 것이 아닌, 건물이 먼저 자연을 끌어안을 수 있도록 노력한 생생한 현장이었다. 만대루는 우리 자손만대에 기리 전하여야할 우리의 문화유산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만대루를 뒤로하고 돌아서니 건물이 좌우에 동재, 서재가 있다. 학생들의 숙식소다.
그 끝 중앙에 아담한 병산서원이 있었다. 즉, 만대루, 동재, 서재, 병산서원이 사각형의 형태를 이루며 자리하고 있는 형상이었다. 병산서원은 자체에 마루와 동서 양쪽에 방을 가지고 있었고 뒷면을 향한 문 3개가 있었으니 창문으로 들어오는 뒤뜰의 풍경이 그대로 액자화 되어 마치 벽에 걸어 놓은 듯싶다. 참으로 아기자기한 공간 분할이었다.
이제 반대로 병산서원 마루에서 만대루를 바라보니 아! 그 풍경을 말해 무엇하리요. 만대루 지붕 끝으로 병산이 얹어져 있고 밑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었다. 자연이 그대로 서원 안에 있음이다. 우리 조상들이 자랑스럽다. 어떤 규격화한 서원 양식이 있었겠지만 서원이 지어지는 곳의 자연을 충분히 이용한 그 안목이 존경스럽다.
그 안목에는 해학도 들어 있었다. 복례문 을 따라 선 담에 작은 기와집은 무엇일까? 호기심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본 나는 그만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뒷간이었다. 양반 뒷간이란다. 한 조각의 가리개가 ‘나는 뒷간이요’ 하고 말해주고 있었다. 이 뒷간과 달리 서원 밖 인적 드문 텃밭에는 달팽이 뒷간이 있었다. 머슴뒷간이란다. 맨땅에 짚으로 지어놓고 하늘은 가리지 않았지만. 한번 휘돌려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양반은 하늘을 가렸지만 머슴은 하늘을 가리지 않았다. 어느 쪽이 더 자유로웠을까. 참 재미있는 모습이었다.
전사청 출입문
서원은 선비정신이 깃드는 곳이기에 검소해야만 했단다. 그래서 건물에 단청을 하지 않았지만 제사를 모시는 전사청만은 단청을 하여 위상을 높였다고 한다. 병산서원 역시 전사청으로 통하는 내삼문에는 태극문양을 넣어 색칠을 해 두었다. 하지만 난 이 사원 전체가 단청을 했다고 지금 믿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배롱나무였다. 정원 곳곳에 심어진 배롱나무들은 연륜을 자랑하며 제 멋으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화려한 색이면서도 소박함을 지니 꽃이 핀 병산서원은 그대로 화원이 되고 있었다.
수령 380년의 배롱나무
우연찮게 이곳을 찾았지만 진정 가장 좋은 시기에 이곳을 찾아왔음에 내심 얼마나 좋았는지… 배롱나무들은 꽃이 핀 제 가지들을 살짝살짝 치켜들고, 혹은 건물들을 감싸 안으며 단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옛것의 푸근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옛것을 새것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굳이 격상 시키지 않아도 그들의 우월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배롱나무들이 오늘만큼은 일등 공신인 듯 예뻐 보인다. 사진기를 누르고 눌러도, 또 누르고 싶은 그들 모습을 뒤로하고 나오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컸다.
서원~ 그 당시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얶던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교육의 내용도 좋겠지만 50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들은 그곳이 위치한 자리와 그 건물들의 건축미학 등을 귀감으로 삼으며 더 중요시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에 우리 선조들의 미적, 자연적 감각을 배우고 그들의 정신을 음미해 보는 장이 될 수 있음을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 언제 다시 찾아와도 지금 느껴본 이 벅찬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마음따라 발길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경궁 (0) | 2012.10.31 |
---|---|
배롱나무, 서원을 물들이다 (0) | 2012.08.31 |
청량산에서 퇴계선생을 만나다. (0) | 2012.08.28 |
도산서원! 그 깊은 아름다움(2) (0) | 2012.08.25 |
도산서원! 그 깊은 아름다움 (0) | 2012.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