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의 비경
구름위를 걷다
우리가 경북일대를 돌아보자며 주산지 다음으로 생각해 낸 곳은 청량산이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그렇게 청량산을 찾아가며 도산서원과 퇴계 종택을 알리는 이정표를 보고 그곳부터 들리자 하여 청량산은 2순위가 된 결과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청량산과 퇴계선생과의 관계는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그런데 도산서원에서의 감흥이 너무 좋아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퇴계 이황선생과 청량산의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을 하게 된 연유는 일전에 ‘퇴계 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라는 책을 읽은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퇴계선생은 70번이나 벼슬을 사양하시고 고향에서 후학에 심혈을 기울이신 분이다. 그러신 분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과거를 준비하고 벼슬을 하라고 한 편지들이 많았다. 그 중 큰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 에는 ‘산사에 들어가 독서할 것을 권유한다’ 라는 편지가 있었다. 잠시 내용을 보면
-전략 -
“너는 내가 멀리 있다고 방심하여 마음 놓고 놀지 말고, 반드시 매일 부지런히 공부하도록 하여라. 또한 만약 집에서 공부에 전념할 수 없다면 마땅히 의지가 굳은 친구와 같이 산사에 머물면서 굳은 결심으로 공부하여라.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 하략 이라고 되었다.
나는 편지글 속의 산사가 지금의 청량산에 있는 청량사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고 그럴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청량산을 찾아가는 길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비가 잠깐 그친 사이의 물안개가 산등성의 계곡에 어려 있는 모습은 웅장한 기상을 품은 듯싶었다. 갑자기 많은 비에 탁한 계곡물이었지만 낙동강자락을 타고 흐르는 자태는, 그야말로 산과 물과 구름과 비가 함께 어우러져 화음을 이루는 장중한 교향악처럼 들려왔다.
낙동강 물줄기를 계속 따라 가다 문득 만난 청량산의 오르는 숲길이 정말 좋았다. 그야말로 청량함이 가득하였다. 비가 거세지도 않고 개일 듯 말듯 한 모습을 보이니 그 틈을 타 물안개들이 속속 산등성을 타고 오르며 산과 나를 숨바꼭질 시키고 있었다. 정말 신비로웠다. 죽장 들고 휘적휘적 걷는 스님이 된 듯, 나는 카메라를 들고 종종 거리며 걸었다. 산 쳐다보랴 행여 신기한 꽃이라도 만날까하며 땅을 눈으로 뒤적여 보며 걸었다. 그 틈에 많은 비에 작은 골들은 작은 폭포를 이루며 큰 물소리로 흐르고 있으니 신계가 따로 없었다. 나는 신선이었다.
소나무 가지에 걸터앉은 구름사이로 탑 하나가 희미하게 보인다. 천년 고찰 청량사다. 안개에 가리운 청량사는 점인 듯 아닌 듯 신비로운 자태를 보이고 있다. 산을 오를수록 구름은 마치 병풍 한 폭씩을 켜켜이 펼쳐 놓은 듯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걸으니 안개가 걷히며 청량사가 뚜렷하게 보인다. 하여 뒤돌아보니 안개는 이제 우리 모두를 가두며 뒤로 물러 서 있었다. 우람한 암봉이 불쑥 솟은 아래의 산사는 참으로 다소곳하였다.
그 아름다움을 빨리 만나고 싶어 미끄러운 나무뿌리 길을 성큼성큼 걷노라니 아담한 집 한 채가 나를 반긴다. 이름이 ‘청량정사’ 란다. 조금 의아한 마음이었다. 사찰 앞에 민가 같은 집이 있음에.. 이리저리 둘러 보다 안내 표지판을 읽고서 나는 마음 속으로 환호작약하였다. 그 집이 바로 퇴계선생과 연관이 있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오산당이라고도 부르는 아담한 집이었다. 아. 나는 뜻을 이루었다. 그 깊고 깊은 산중에서 또다시 퇴계선생을 만나다니...
이 정사는 구한말 의병투쟁의 본거지가 되었다는 연유로 일본군에 의하여 불태워 졌다가 1901년에 복원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 시절 이 깊고 깊은 산속에 들어와 공부하신 퇴계선생의 흔적에 그만 눈물이 나려한다. 나의 막연한 생각에 확신을 갖게 해 준 청량정사의 그윽한 운치에 발걸음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그 옆 웬 조금은 어수선한 건물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바라보니 그대로 현대의 운치로 옆 오산당과 조화를 이룬 듯싶다. 누군가가 뜻을 가지고 산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정서를 담뿍 안겨 주는가 보다. 정사 옆 고목나무에게 묻고 싶었다.
정사를 지나 청량사에 오르니 독경소리가 멀리까지 낭랑하다. 그때서야 생각난다. 오늘이 칠석날이었다. 그에 이 깊은 산중에서 여는 칠석법회에 참가하려온 신자들이 우중에서도 지성을 드리고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음이 저절로 이니 한 구석에 서서 기도에 읍하고 돌아서 나왔다. 어쩌면 퇴계선생께서 이곳까지 나를 인도 해 주셨는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우리 아이들의 기원을 넣었다. 이제 돌아가는 길~~ 도산서원을 만나고 그에 퇴계 선생이 기거하며 공부했던 청량정사를 만났으니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뿌듯함에 잠긴다. 돌아서는 등 뒤로 펼쳐지는 비경들이 차마 잊힐까.
청량정사(오산당)
청량정사 옆 고목
청량정사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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