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방송 TV에서 보여주는 한 광고에 눈길이 머물렀다. 김연아 선수가 평창의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모습에 이어, 학생들의 영어공부는 문법이 아닌 이처럼 소통을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에 깊이 동감하노라니 한 생각이 스치며 나를 미소 짓게 한다. 학창시절 영어를 문법위주로 배웠다. 단어의 스펠링을 외우고 발음기호 따라 읽고 해석하는 것이 영어공부였다. 오로지 그렇게 하는 것만이 영어를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연습장이 구멍이 날 정도로 반복해 쓰면서 열심히 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짤막한 문장을 해석하는 정도의 영어 실력이다. 서로 다른 언어를 서로간의 소통을 위해 배워야 했음에도 우리는 오직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 결과에 따른 나만의 에피소드가 있었으니 …
사회초년생이 되어 출 퇴근을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다니던 서울생활 시절이었다. 버스를 기다리거나, 혹은 내가 탄 차를 앞서가는 차들을 무심코 바라보다 언젠가부터 버스 뒷면을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버스 뒷면에는 하나같이 커다란 영어 대문자로 ‘HYUNDAI’ 라고 붙이고 다니는 것이다. 도대체 저게 무슨 뜻일까 ’휴일‘ 이라는 뜻의 holiday 도 아니고… 하며 “휴운대이‘ ??” 하면서 발음기호를 조합하여 읽으면서 궁금증을 가졌었다.
하루는 오빠에게 버스 뒤에 붙어 있는 ’휴운대이‘ 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오빠는 말을 못 알아듣고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버스 뒷면에 커다랗게 써 있다고 재차 설명을 하니 오빠는 그만 포복절도를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 동생이 똑똑한 줄 알았는데 이제 어쩌냐…” 하면서 계속 웃느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알았다 그것은 현대라는 기업의 이름이라는 것을…
사회 전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초년생이 학교에서 배운 대로 영어스펠링을 보고 발음기호부터 생각하여 읽고 뜻이 무엇인지에 골몰했으니 고유명사라는 생각을 털끝만치도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내가 배운 영어는 소통의 역할이 아닌 그저 하나의 공부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 결과 서로 간에 알고 알리려는 소통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 간의 소통은 늘 흐르고 있음이다. 다만 그걸 깨우칠 수 없음은 내 의식이, 발음기호만을 찾았던 것처럼 줄곧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까닭이리라. 이제 세월의 연륜이 쌓이면서 소통을 이루고 싶은 간절함의 대상이 있으니 자연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이다.
입춘의 절기가 지나면 땅들이 숨을 쉬느라 봄 냄새를 풍기는 해토머리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해토머리인 요즈음이 가장 아름다운 봄의 속 풍경이라는 느낌이 든다. 나무들도 꽃들도 부풀거리는 땅의 기운을 받아 부지런히 치장들을 하고 있을 터이니 그 모습들이 얼마나 예쁠까. 노란 개나리, 붉은 진달래에 이어 키다리 목련은 느지막하게 크게 하품하며 나올 것 같은 그런 모습들을 상상하며 그들이 말없이 건네는 뜻을 헤아려보며 나름대로의 소통의 기쁨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봄비가 지나가고 햇살 좋은 한 낮, 노루귀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니 솜털을 보송보송 지닌 채 피어나고 있었다. 묵은 낙엽이 소복하고 찬바람이 머무는 비탈진 곳에, 두어군데 개들의 분비물이 널브러져 있었지만 그들은 아무런 불평 없이 제 몫을 해 내고 있었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무리지어 꽃대를 올리고 저희들끼리 빙 둘러 서있는 모습이 마치 몸 전체로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았다. 춥다는 표정일까/ 막 피어나 눈부시다는 표정일까/ 아니면 불청객인 나를 외면하는 모습일까/ 하지만 난 그들이 몸짓으로 전하는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겠다.
저들의 삶과 나의 삶이 동일 선상에 있지 아니하고, 우리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것은 분명 자연의 이치일 것이다. 설령 내가 저들의 언어를 배운다 해도 내 의식에 갇혀 나만의 방식으로 깨우칠 것이니, 발음기호만으로 읽으려 했던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무식함의 탈을 쓴 채, 스스로 말하지 않는 그들만이 알고 있는 삶의 신비함을 더 알려 한다면 이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중대한 일이다.
침묵하는 생명이지만 저들이 늘 이맘때면 그리워지고 보고 싶은 까닭은 그들 스스로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아쉬움을 남기기 때문이리라. 아쉬움에 대한 간절함은 그리움이 되어 비록 개똥이 구르는 산비탈에서 피어나는 저들이지만 무진장 보고 싶은 것이다. 그냥 느끼며 소통할 수 있는 아쉬움과 그리움이라는 감정도 언어가 분명하다.
그 느낌의 언어는 무엇일까. 더 이상 알려하지 않겠다. 그것이 서로에 대한 배려일 테니까. 저들과 나 사이에 공통된 언어는 없지만, 느낌을 나누며 소통하기를 원하는 까닭은 저들이 비밀스럽게 살아온 날들의 이치 속에서 나를 찾아보고픈 마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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