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의 탱자나무
언뜻 만나는 겨울 산의 나무모습은 황량하기만 하다. 하지만 겨울 숲의 진미는 나무들이 보여주는 간결함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잎을 주르륵 훑어 내리기라도 하듯, 잎 하나 없이 서있는 나무는 단정함이다. 그 맨 몸으로 추위를 이겨내는 모습은 강인함이다. 겨울 숲에서는 무성한 잎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나무의 속살까지 세세히 볼 수 있다. 줄기의 굵기도 제각각이지만 뻗어내는 가지모습도 가지가지다. 또한 각각 지닌 표피의 무늬로 세월의 풍상을 또렷이 보여준다.
큰 바람덩이가 몰려오면 나무들은 그들 특유의 몸짓으로 응대하고, 그들 내면이 지닌 각자의 소리로 응대한다. 나무들은 굵은 몸체에 힘주어 땅을 딛고서 높은 가지들만 흔들며 바람을 맞는다. 마치 몸 깊숙한 어느 곳에 중심점이 있어 그로부터 나뭇가지를 잘 조정을 하듯, 나뭇가지들은 그저 이리 저리 흔들리며 바람에 순한 양처럼 순응하고 있다. 그런 나무들을 바라보노라면 나의 정신은 어느새 바짝 긴장이 되곤 한다.
나무들에게도 가지를 펼치고 키워내야 할 공간이 필요하기에 서로가 자신의 공간을 조금씩 나누며 살아간다. 줄기에서 제 멋대로 뻗어낸 듯싶은 가지들이지만 그들은 절대 다른 이웃한 나무들을 헤치지 않는다. 제 가지를 키우기 위해 상대를 상처 내는 욕심이 있었다면 그들은 나무로서의 아름다움을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이 어울리기 위해 나눔의 지혜를 터득하는 시기는 아마도 겨울이 아닐까. 모든 나무들이 옷을 벗고 있는 겨울이 있어 이웃나무들과 부딪치지 않는 거리를 가늠할 수 있기에 이 겨울은 그들에게 소중한 시기이다.
내 가지들이 어느 곳을 향해 뻗어야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튼실한 가지로 자라고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까를 줄기안의 중심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몰입이 빚어내는 침묵으로 겨울 숲속은 더욱 적막하다. 그렇게 나무들은 적막으로 살찌우고 허공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랬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배우고 알아야 할 삶의 이치가 아닐까 싶다. 이렇듯 겨울 숲의 나무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요즈음, 우연히 책속에서 한 탱자나무를 만났다.
이곳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여 거리에 있는 가람 이병기선생의 생가에 있는 탱자나무가 기념물로 지정되어있다는 내용이었다. 눈이 확 밝아졌다. 선생은 우리말을 말살시키려 서슬이 시퍼렇던 일제 침략의 시절, 우리말과 글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 애썼던 대표적인 분이시다. 그 분의 시조를 교과서에서 배웠고 맑은 산책길에서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 ‘별’의 작사자이시다. 그래서일까 생가를 찾아 탱자나무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울타리용으로 쓰이는 잡목에 가까운 나무인데 기념물로까지 지정이 되어있다니… 궁금증이 밀려왔다. 제 몸에 돋은 가시로 울타리 노릇을 했기에 우리에게 더욱 정감이 가는 나무, 이 겨울에는 어떤 모습일지 자꾸만 눈에 어른거린다. 회색빛이 짙게 내려앉은 일요일 오후, 내비의 안내를 받아 찾아 나섰다.
곳곳의 잔재한 겨울풍경들과 눈 맞춤하며 도착한 선생의 생가는 참으로 고즈넉하였다. 선생의 모습을 만난 듯 정연한 마음이 되니 발걸음마저 조심스럽다. 앞마당에 자그맣게 지어진 연못 주위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겨울 모습으로 서 있었다. 미끈한 몸매를 자랑하는 배롱나무의 수줍음이 있고, 금방이라도 봄을 알리려는 산수유나무와 동백, 작은 돌멩이 하나하나가 어우러져 시인에 어울리는 풍치를 자아내며 생가를 지키는 듯싶다.
연못을 마주한 아주 앙증맞은 모정 승운정 옆에 탱자나무가 있었다. 멀리서 나무를 찾아 두리번거렸을 때, 다른 나무로 생각 했었다. 탱자나무에 저렇게 굵은 줄기가 있었던 것일까 하는 의아심을 지닐 정도로 굵게 올라간 줄기위에 여러 갈래의 가지를 뻗고 수많은 가시와 몇 개의 탱자를 달고 있었다. 수형이 어느 나무 못지않게 아름다웠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가시와 상관없이 다소곳했다. 문득 이 나무는 선생의 올곧은 마음을 받고 자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경에 따라서 나무도 이렇게 올곧게 자랄 수 있음을 보니 하물며 사람은 어떨까하는 강한 경외심마저 일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랑하고 널리 보급시키시던 분께서 뇌일혈로 쓰러지신 뒤, 이곳 생가에 내려오셔 어린애처럼 지내시면서 방의 창을 열고 말없이 늘 이 탱자나무만을 바라보셨다 한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리신 선생의 허공을 향한 눈길을 어쩌면 간절함으로 받아낸 탱자나무가 아니었을까. 나무는 선생의 마음 글을 받아쓰기라도 한 듯, 스스로의 가시들로 한글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느라 열심이었을까. 그렇게 가지는 방문을 향해 뻗어 있었다.
선생의 허공을 향한 눈길과 허공을 찾아 자라는 나무사이에는 서로 깊은 마음의 길이 트였을 것 같다. 아, 가시만 남은 모습이지만 이렇게 나무를 세세하게 볼 수 있는 겨울의 끝자락인 지금 찾아온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우리말을 지키시며 실천하셨던 선생의 굳은 의지가 아마도 탱자나무 깊은 곳에 중심점으로 자리하고 있기에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만 같다.
사람이 살아가며 중심을 잃지 않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스스로 깨달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겨울나무와 가람 선생의 생가를 지키는 탱자나무에게서 배워본다. 겨울나무들이 연출하는 간결함과 소박함, 그리고 적막함으로 내 중심점을 튼튼하게 키워 내는 일은 이렇게 길이 보존 되고 있는 법, 이제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겨울 동안 공부해둔 모든 지혜를 나무들은 쏟아 낼 것이다. 그들의 작은 한 점이라도 내 마음의 양식으로 키워 봄을 맞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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