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베란다에 서서 앞산을 바라보니 앞산의 나무들도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곱게 물들고 있었다.
동쪽에서 뜨는 햇빛에 부분적으로 더욱 밝은 단풍이다.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틈새에 자꾸 쳐다보는 앞산 가을,
시간이 지날수록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가을 햇살은
속속들이 지상으로 파고들고 있다.
햇살이 고우니 바람결도 고울 거라고 나를 불러내는 가을빛이다.
할 일 마치고 조금 마음의 여유를 갖자고 작정하며 슬그머니 밖으로 나온다.
들녘의 풍경은 점점 가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사르르 달려드는 기분 좋은 바람결에 일어나는 알 수 없는 가슴의 아릿함은
내 마음속 깊이 자리한 감성까지 곱게 물들이며 무언가 모를 힘으로 나를 이끈다.
가을 색이 짙어간다고 함은
어쩌면 모든 것들의 차림새가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분을 잃은 나뭇잎들의 부석거림,
반쯤은 메마른 줄기 끝에 피어있는 작은 꽃들의 모습,
이 모든 것들은 가을만이 빚어내는 가을 색인 것이다.
그중에 이 몸도 초라한 차림이니 하마 가을 색이 되었을까.
나보고 무슨 뚱딴지같은 생각을 하느냐며 지청구하는 뚱딴지가 고와 보이고
태어날 때부터 미리 하얗게 센 머리를 자랑하는 억새 물결에
내 몸을 끼워 보지만 늙음을 거부하는 내 모습이 더 초라하다.
마른 가지 틈새에서 무성히 피어나는 둥근유홍초의 빛은 왜 그리도 선명한지…
아~~ 노랑 산국도 이제 흐트러진 꽃망울을 달고 있으나 향기만은 여전하다.
가을 시골길을 천천히 달리는데
밭두렁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호박의 모습에 웬일인지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호박잎 하나 없는 억센 줄기는 제 몸을 다 소진해 버린 모습이지만
둥그런 호박은 덩실하니 탐스럽기만 하니
엄마 젖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난 어린아이 같았다.
엄마(줄기)는 아직도 안간힘으로 자식을 끌어안고 키우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니
이리저리 뻗어있는 메마른 줄기는
내 어머니 손등의 핏줄처럼 느껴지며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때가 되면 물러나는 것이 자연법칙이고
본분과 역할을 다한 자의 뒷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했던가
저 단순한 호박줄기는 떠날 때를 아는 사람처럼 아름답다.
결혼 3개월에 들어선 아들은 결혼생활에 나름 익숙해지는 것 같다.
계절이 바뀌면 엄마 옷부터 걱정하고, 엄마 좋아하는 책도 사 나르고
꼭 딸처럼 나를 챙겨 주곤 했는데 차츰 옅어지고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해준다 해도 내가 부담스러울 것이니 당연함이라고 나는 받아들이고 있다.
결혼 전에는 새 아파트에 들락거리며 청소도 해주고, 가구 자리 배치도 해주고
그릇도 사주곤 했는데 결혼 후에도 아직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둘이 모두 직장에 다니는 만큼 제대로 해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맘으로
가끔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간단한 밑반찬과
어느 땐 아들 좋아하는 꽃게탕 등을 끓여 보내곤 하면서도
스며드는 허전한 마음에 나 혼자 내 맘을 다스리곤 하였다.
문득 내 역할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음에 은근히 놀라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이제 나의 호박 줄기는 서서히 쇠진해 가고 있지만
나의 호박이었던 내 아이는 어느새 작은 어른이 된것이다.
아들이 잘 사는 일이 더 큰 희망 사항으로 바뀌었다.
아들이 아닌 며느리에게 전화하니 아주 밝은 목소리로 받는다.
그래 그럼 되었다.
나 혼자 스스로 마음 놓으며 가을 들녘을 달렸다.
메마른 나의 줄기에 서운해하지 말고
아름다운 뒷모습으로 인식하라 일러주려고 이 가을은 나를 불러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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