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계절의 페이지 터너가 될 수 있을까.

 

어제는 토요일인지라 오전에 청소하고 반찬 몇 가지를 했다.

들깻잎 순을 삶아 나물무침을 하고, 고구마순을 삶아 호박과 꽃게 한 마리를 넣고 된장 지짐을 해 놓고,

미역 냉채를 하기 위해 미역을 담가 놓고, 양배추를 채 썰어 놓고, 오이깍두기를 담았다.

에어컨을 켜고 했지만도 땀을 흘렸다.

이런 나를 보더니 남편이 점심을 삼계탕으로 먹자 하여 18,000월 하는 삼계탕을 먹고

나는 배롱나무꽃이 보고 싶어 옥구향교로 향했다. 남편에게 함께 가자 청했지만 덥다고 싫단다.

 

▲ 옥구향교

옥구향교에 도착하여 꽃이 한창이겠지 생각했는데 꽃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은 주차할 공간이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온 것 같은데 꽃을 볼 수 없었다.

배롱나무를 자세히 바라보니 세상에! 꽃대궁의 꽃봉오리가 다 떨어져 버린 것이다.

꽃이 활짝 피었다 진 경우라면 바닥에 꽃잎이 수두룩할 터인데 그마저도 없었으니

이는 분명 폭염에 녹고 폭우에 떨어지고 강한 태풍에 쓸려나간 것이리라~ 참 허무한 마음이다.

 

▲ 꽃봉오리를 잃은 배롱나무

 

산책로 출입금지는 금요일 오후부터 해제되었다.

저녁 시간에 산책길에 나서니 많은 사람이 걷고 있었지만

산책길 곳곳에 생긴 물웅덩이는 완전히 마르지 않았다.

습한 기운에 더 덥게 느껴지는 것인지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호수 주위의 나무들을 바라보니 그 많은 나뭇잎이 모두 부동자세로 서 있다.

폭우에 지치고 강풍에 휘둘려서인지 만사 귀찮다는 듯 움직임이 없다.

아, 나뭇잎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바람이 제 임무를 잊은 듯싶다.

지난 며칠 너무 많은 힘을 소진해 버렸구나.

대신 내 몸의 세포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까닭에 땀이 비 오듯 하는 것이다.

 

 

산책길에 늘 들고 나오는 작은 부채로 연신 바람을 일으키며 걷는 데

나와 반대 방향으로 엄마와 함께 걷는 어린아이가 내 부채를 보았나 보다.

엄마한테 부채 달라고 떼를 쓴다. 내 발걸음이 늦어진다.

엄마는 난감해하며 여기는 없으니 집에 가서 주겠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다.

나는 몇 걸음을 뒤돌아가 아이에게 부채를 주었다. 얼마나 더웠을까.

얼른 받아 드는 아이의 천진함에 웃음이 나는데 엄마는 고맙다며 인사를 한다.

나는 부채 대신 손수건으로 달려드는 모기를 쫓으며 걸었다.

 

세월이 참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

봄꽃을 찾아 수목원으로, 산으로, 뒷산으로 찾아 나서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하지가 지나고 초복, 중복도 지나고 입추가 지나더니 말복도 지났다.

나는 우리나라의 뚜렷한 사계절을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세상사는, 아니 나의 인생사는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자연만큼은 그 누가 계절의 옆에 서서 조용히 계절의 페이지를 넘겨주는지

그들의 주고받는 정확한 몸짓이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언제나 정확하게 제 자리를 지키며 떠나고 찾아오고 있으니

늘 나의 얽힌 인생사를 풀어갈 수 있는 해답의 힌트를 자연에서 선물처럼 받으며 지낸다는 믿음이 컸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자연도 자꾸 그 정확성을 잃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6월 25일경부터 찾아오는 장마가 올해는 들쑥날쑥하면서 급기야 물 폭탄을 퍼부어 대더니

내가 살아오는 동안 처음 느껴보는 불볕더위를 쏘아대었다.

이런 경우라면 올가을은 거친 바람이 들판을 휩쓸 것 같고

겨울은 폭설로 우리를 가두어 둘 것만 같은 두려운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해마다 지나는 태풍마저 갈팡질팡 제 길을 못 찾으며

제 몸에 지닌 바람과 비를 뿌리며 혼동을 야기시키며 지나갔다.

태풍은 비를 내려주어 필요하지만 재해를 가져오니 악이라 하여

그 또한 자연의 일정한 법칙이라 여기며 필요악이라고 받아들이며 살아왔었다.

 

▲ 그나마 꽃이 많이 핀 배롱나무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무엇이 잘 못 된 것일까. 돌고 도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부드럽게 살아가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보이지 않는 그 존재는 무엇일까.

우리는 자연과 동조하며 끝까지 함께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봄이 되면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는 열매를 키우고 가을에는 수확하고 겨울에는 갈무리해야 하는 이치를

단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믿음인데 어디서부터 틀어진 것일까.

어렵게 이끌어 갔던 잼버리 폐영식에서 한 외국 잼버리 대원의 인터뷰에서 하는 말

‘지구 온난화에 따른 이상 기온으로 고생했지만 국민들의 친절함에 잘 마무리되었다.’는 의젓한? 말에

조금 안심되는 까닭은 아마도 그 대원의

그 누구를 탓하기보다는 자연 현상에 의한 것 이라는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온난화 현상은 모두 우리 인간의 지나침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어느 순간 우리는 자연과 일심동체를 이루던 마음을 잃어 가고 있었다는 결론이다.

 

▲ 사진 : 인터넷 검색

순간 난 느닷없이 연주회 모습을 떠올렸다. 피아노 리사이틀이나 교향악단연주의 피아노 협연 시

연주자가 그 많은 악보를 암보하여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감탄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피아노 연주자는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과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까다로운 음악이거나 아직 암보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연주를 하는 경우

대개는 Page Turner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다.

애칭으로 ‘넘돌이(남자)’ ‘넘순이(여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그의 역할은 연주자 못지않게 중요하다.

피아노 연주자는 계속해서 악보를 보며 피아노를 쳐야 하는데

페이지 터너가 조금이라도 빠르거나 늦게 악보를 넘기면

연주의 흐름을 잇지 못해 어쩌면 연주회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호흡으로 협연하는 중요한 동반자이지만

터너는 연주자의 심기를 흐트러지지 않기 위하여 아주 작은 행동이라도 조심해야 한다.

연주자를 가리거나 연주자보다도 튀는 의상을 하여서도 안 되고

연주가 끝난 후 연주자가 박수를 받는 동안에도 터너는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한다.

그는 뒤에서 조용히 연주자를 도와주는 역할만 할 뿐이다.

 

자연과 우리 사람들의 관계도 이러하지 않을까.

우리가 계절의 페이지 터너가 되어 좀 더 자연을 아끼고 위하며 살아간다면

자연도 리드미컬한 움직임으로 계절을 아름답게 장식해 줄 터인데

우리 인간들의 지나침으로 단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돌고 도는 자연의 순환을 잃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내가 보이지 않는 작은 실천으로 페이지터너가 된다면

바람은 나뭇잎의 부동자세를 풀어 줄 것이고

덥다고 짜증 내는 아이의 마음을 순하게 이끌어 줄 것이다.

꽃대궁의 꽃봉오리를 잘 보살피며 꽃의 한때를 지켜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자연과 나(우리)는 아름다운 협연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