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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따라 발길따라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 -보길도에서

물소리~~^ 2023. 7. 10. 16:25

 

 

 

지난 7월 1일에 연화도를 다녀온 후

일주일 만인 7월 8일에 보길도를 다녀왔다.

나는 업무상 바쁜 시기였지만 토요일이라는 든든한 핑계를 대며

한 번 작정한 남편의 의견을 저버리지 못했다

남편 역시 이리저리 따져보고 갑자기 정한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보길도는 아이들 어렸을 때 한 번 다녀왔는데

해수욕장만 기억이 날 뿐 전혀 다른 무엇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새벽? 한밤중에 정확히 3시 10분에 출발했다.

보길도는 완도 화흥포 항에서 노화도 동천항까지 가는 배를 타야 하는데

예매가 되지 않고 현장 발권하는 까닭에 서둘러 출발한 것이다.

 

산청휴게소에서 아침을 누들식(면)으로 했다

어딘가로 떠날 때는 나그네가 되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왠지 우동이나 라면을 먹는 것이 여행 기분을 더 해 주는 것 같다는 내 느낌이다.

그렇게 나그네식 아침을 먹고 준비해 간 커피(믹스) 한 잔을 둘이 나누어 마시고 다시 출발~

아니~ 어디쯤 가는데 비가 듣기 시작한다.

어쩌지 못하고 내처 달렸다.

간신히 화흥포 항에 도착하니 배는 손님들과 차를 싣고 있었다.

매표소로 뛰어가니 첫 배여서 좌석이 남아 있단다.

6시 50분에 배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노화도 까지는 30분이 소요되는데 그곳 노화도에서는

보길도까지 연결된 다리를 건너 차로 갈 수 있다고 하니

보길도 가기가 조금은 더 수월해진 것이다.

 

▲ 노화도 동천항에서 보길도까지 자동차로 이동

노화도에서 보길도 들어가는 보길대교까지는 생각보다 멀어

길을 잘못 왔을까? 하는 걱정 끝에 만난 보길대교를 건너

보길도에 들어간 시간은 8시가 조금 못 되었다.

섬으로서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우선 천천히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잔잔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 보길대교를 건넜다.

 

우스갯소리로

오스트리아는 모차르트가 먹여 살리고

스페인은 가우디가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그 사람들의 영향이 그 나라의 관광자원으로서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잠시 보길도를 천천히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이곳 보길도는 윤선도가 먹여 살린다고 할 만큼

모든 곳의 관광지는 윤선도로부터 기인했고

많은 상호들 역시 그의 호나 세연정의 이름을 차용하고 있었다.

 

윤선도의 집안은 명문가이면서 부유했다고 한다

하여 이곳에 유배 와서 여유롭게 지내는 윤선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도 있었지만

그는 그가 누리는 부를 아낌없이 주민들에게 베풀며 살았다는 증언들도 있으니

한 사람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들은

그 옛날에도 만연하고 있었음에 조금 불편하였으나

그의 좋은 업적들을 돌아보고 음미하자고 마음을 돌려세웠다.

그냥 시인으로서 당대를 살았으면 되었을 것을 타고난 유능함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유배생활을 한 윤선도!

다행히도 윤선도의 문학적 업적이 더 많이 남아 있어 회자되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한 마음이다.

 

제일 먼저 세연정을 찾아가 보기 위해 매표소에 들렸는데

9시부터 입장 가능하다면서 먼저 다른 곳을 다녀오시라고 한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다시 섬을 돌면서 입장 제한 없는 곳부터 찾아보기로 하고

제일 먼저 송시열의 글씐바위를 찾아보기로 했다.

안내판을 보고 조금 의아했다

글씐바위라니~ 아마도 무슨 의미가 있겠지… 하며 찾아갔다.

 

▲ 글씐바위를 찾아가는 길

 

▲ 길 끝에 나타난 망망대해 : 아마도 옛 글씨를 그대로 안내판에 인용한 듯싶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1689년 이조 숙종 때

제주도로 귀양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상륙하였던 곳으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한시(漢詩)를 바위에 새겨 놓았다고 한다

 

 

 

우산을 받쳐 들고 글씐바위를 찾아가려고

넓은 바위 위를 걷자니 조금 겁이 난다

미끄러지면 어떡하지? 조심조심 걷노라니 

글을 새긴 바위 아래 안내문이 있었다. 이곳이라고...

 

그런데 안내문만 있고 글씨는 보이지 않는다??

 

낭떠러지 바위를 바라보노라니 아찔하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이 살금살금 끝까지 걸어봐도 만날 수 없었다.

 

우람한 바위들이 있는 경치 좋은 이곳을 그 당시 어떻게 찾아왔을까

 

▲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바위를 찾지 못한 서운함을 안고 되돌아 섰는데

 

▲ 발 아래 암각시문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둘러보니 아!! 글씨가 보였다.

 

▲ 오랜 세월을 견디느라 많이 마모된 상태였지만 글씨 모습은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 그냥 마음이 뭉클하였다.

 

▲ 송시열의 글씨 / 사진 인터넷검색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진? 초상화? 그가 집필한 책?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곳 보길도에 와서 유배 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

우연히 머무르면서 자신의 심정을 새겨 놓은

송시열의 바위 글씨를 보노라니 만감이 교체한다

날씨마저 비가 오락가락하며

뿌연 안개가 내려앉고 있으니

그 당시의 주자 성리학의 대가인 송시열의 마음을

더 이상 알려 하지 말라는 듯싶지만

글씨 흔적만으로도 송시열을 기릴 수 있음에

내 발걸음을 끌어가며 그의 자취를 느끼게 했나 보다

한때 윤선도와 동시대를 살았던 학자인데

그 당시 이곳에서 혹시

윤선도를 만났을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돌아섰다.

 

 

 

▲ 돈나무의 싱싱함이 더욱 아련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