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트(rosette)가 되어 겨울을 살아간다

 

 

▲ 금계국 로제트

 

설날이 낀 연휴는 4일 동안 이어졌다.

명절이라는 듬직한 시간 안에서 쉬어가는 우리 사람들인데

세월의 수레바퀴는 잠시도 쉬지 않고서 1월 하순까지 걸어 나갔다.

벌써?라는 놀라움이었지만 묵묵히 나아가는 세월에게 태연한 척하며 일요일 한낮에 산을 올랐다.

여러 쉬는 날 중 한 번도 뒷산을 오르지 않는다면

그냥 산에 미안한 마음이기도 하여 매서운 바람을 뚫고 나갔다.

 

겨울 숲이 품은 세찬 바람은 더욱 날을 세운 듯, 잠깐 걸었을 뿐인 내 양 볼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얼얼하면서 시린 감촉은 느슨한 내 몸을 꽉 조여 주며 팽팽함을 안겨준다.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기분 좋은 맛이다.

나뭇잎 하나 걸치지 않은 겨울 숲은 썰렁하면서도 언뜻 잔잔한 안온함을 품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린 그리움 가득한 곳을 찾아온 것 같으니 스르르 편안해진다.

 

▲ 찬바람 가득한 겨울의 뒷산 오솔길

 

추운 날임에도 작은 새들이

높은 나뭇가지 위를 포르릉포르릉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맑은 소리가 참으로 감미롭다.

저들은 무엇이 저리도 즐거울까.

나무들이 남긴 열매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음이 즐거울까

아님 함께 친구들과 노니는 몸짓일까. 귀여움에 저절로 미소를 머금는다.

 

오솔길 아래 양지에 자리한 어느 이름 모를 무덤가의 금계국이 낙엽 사이에서 초록 잎을 내밀고 있다.

‘어쩌자고 이 추위에 나왔니’ 하며 바라보노라니 땅 위에 나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모든 잎들을 쫙 펼치고 납작하게 땅에 붙어 지내고 있었다.

로제트(rosette) 현상이었다.

방사상으로 잎이 난 모양이 마치 장미꽃(rose) 같아 '로제트식물'이라고 하는데

한 자리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식물들의 지혜다.

 

추운 한 겨울임에도 풀들은 있는 힘을 다 해 올린 싹을 땅에 쫙 펴고 있는 까닭은

온몸으로 햇볕과 땅 속의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함이며

이런 자세로 햇볕을 받으면서 땅속의  뿌리가 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렇게 겨우내 한 줌의 햇볕도 헛되지 않게 갈무리한 힘으로

봄이 되면 꽃대를 쑥 올려 꽃을 활짝 피우고

꽃이 지면 열매를 맺고 씨앗을 만들어 종족을 번식시키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날씨에 적응하며 지혜롭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진한 모성애를 느꼈다.

자식을 위한 삶을, 온 몸으로 살아가는 일은 비단 사람만이 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따뜻한 양지를 찾아 쪼그리고 앉아 로제트가 된 금계국을 바라보노라니 우리 거실의 콩고 꽃이 오버랩된다.

 

▲ 꽃에 영양을 주느라 희생된 커다란 잎

 

지난 12월에 꽃을 피운 콩고는 또 하나의 꽃을 피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느라 영양분을 다 빼앗기고 있었는지 커다란 잎 하나가 노란빛으로 변하며 시들해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아기를 위하는 엄마의 몸에서 철분이 빠져나간다는 믿음으로 바라보니 참으로 안쓰럽다.

우리 집 콩고는 다산 체질인지 그에 또 하나의 꽃봉오리가 올라오고 있으니 얼마나 힘이 들까.

 

 

얼마 전에 한 방송국에서 방영했던 한국기행이란 프로를 시청했다. 재방송이었다.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동해안을 따라 걷는 770km의 길을 구간구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자연이 만든 아름다운 풍경과

그 풍경 속에서 삶을 캐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버무려 진행하는 내용이 진하게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해안가의 삶인 만큼 바다를 일터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

아니 온몸으로 일하는 우리 어머니들의 이야기에 그만 가슴이 찡해지고 말았다.

 

70세를 넘기신 할머니해녀의 거친 숨비소리는

가만히 앉아 TV를 바라보는 나의 고른 숨소리를 부끄럽게 하였다.

 

사별한 남편대신 배의 선장이 된 어머니,

아마도 진행자가 여자도 선장을 하느냐고 물었나 보다.

‘왜 여자는 선장 하면 안 되나요?’ 하며 말하는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자랑스러움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배어 나오는 쓸쓸함에 그만 내 마음이 울컥했다.

아들과 함께 걷어 올리는 그물에 걸려 나오는 도루묵이 많기도 하건만,

아들네와 두 집 살아가려면 오늘의 양은 부족하다고 한다.

남편대신 선장이 된 엄마는 아들 몫부터 챙기며 하루를 온몸을 다해 살아가고 있었다.

 

해파랑길의 종착지인 고성의 어촌에서는 양미리 건조가 한창이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가운데에 양미리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빙 둘러앉아 양미리 엮기에 여념이 없다.

손놀림이 어찌나 빠르고 정확한지 놀랍다.

‘우리는 이제 눈감고도 한다.’ 고 하시는 주름 가득한 얼굴에는 그늘 한 점도 없으시다.

젊은 날부터 오직 자식들 가르치기 위해 해 온 일이라고 한다.

자식들 다 키운 요즈음에는

자식들에게 짐 되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한다고 하시며 이 일도 이제 우리 대에서 끊길 것이라 말씀하신다.

길에서 만난 삶의 여정은 모두가 자식들을 위해 온몸으로 일하는 어머니의 삶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자연이 세월을 타고 빚어낸 풍경보다도 더 아름다운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었다.

 

문득 산등성을 넘어온 차가운 바람이 내 등을 스치며 지난다.

온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람은 싣고 왔을까.

그 마음들을 땅에 딱 붙인 몸으로 겨울을 살아가는 금계국을 통해 전해 준 듯싶으니

뜻 모를 정취가 애잔하게 나를 스쳐 지난다.

거추장스럽지 않게 살아가기만을 꿈꾸어온 내 마음을 얼른 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