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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의 빨강은...

물소리~~^ 2022. 12. 29. 12:55

 

 

 

눈이 내려도 너무 많은 눈이 내렸다.

연 이틀 동안 차량에 쌓인 눈을 쓸어내리는데 1시간 30분이 걸렸다. 땀이 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눈 그친 하늘이 참 맑다. 맑은 하늘 아래 멀리 보이는 에움길이 촉촉이 젖어 있다.

급하게 염화칼슘으로 제설작업을 한 까닭이리라. 완전 무장을 하고 산 초입까지 가 보았지만

쌓인 눈의 두께 때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에움길을 따라 잠시 걸었다.

하얀 눈을 제 몸에 얹고 있는 나무들이 추워 보인다.

애처로운 모습으로 떠나는 것들이 더없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요즈음의 나무들이 그런 모습이 아닐까.

 

▲ 사철나무와 노박덩굴


행여 미끄러질까 조심조심 걷는데 하얀 눈 속의 빨간 열매들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푸른 잎의 사철나무에게 눈덩이를 맡기고

자신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빛을 발하고 있는 노박덩굴의 운치에 한참을 서서 취해 본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속에

감나무, 노박덩굴, 남천, 사철나무 등 번식을 위한 씨앗으로 맺은 열매들은 모두 빨간빛을 발하고 있다.

나무들이 빨간색의 열매를 맺는 까닭은 파장이 긴 빨간색을 띠워 새들에게 잘 보이도록 하는 것이라는

지극히 과학적인 이야기를 듣노라면 할 말을 잊곤 한다.

나무와 새들은 글도 모르고 언어도 모르지만 서로 나누는 이치는 알고 있는 것이다.

 

▲ 감나무와 직박구리 (뒷산에서)


그렇게 서로 간에 말없이 주고받는 자연적인 이치의 소중함을 우리의 생활 깊숙이 끌어 놓은

옛사람들의 지혜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정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먹을거리로서의 소중한 것에 대한 외경심으로 감나무와 까치밥의 의미도 남다르게 지켜 내려오고 있다.

자연에 빗대어 우리의 마음을 전하는 일처럼 따스한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자연과 인간은 상호 존중하며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다.

한 자리에 서서, 말없이 내실을 기하는 자연에 의지하고 바램을 얹어 두는 일은

자연스레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순박함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빨간 감에, 아니 겨울 산을 멋스럽게 장식하는 빨간 열매들에 나름의 해석을 부여하고 싶다.

서로가 지닌 고유성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소중함이 있기에 

그 소중함에 나의 작은 소중함을 걸어 보며 빨강의 의미를 찾아보고 싶다.

 

▲ 눈덩이와 노박덩굴


빨강은 정열이고 일편단심(丹心)이다.

도장을 찍으며 약속을 나누는 인주의 빛도 빨강이다.

옛 임금이 입었던 곤룡포 빛의 빨강은 성역(聖域)이다.

뭐니 뭐니 해도 빨강은 재앙을 물리치는 빛이다.

아들을 낳으면 금줄에 빨간 고추를 끼워놓고 삿됨을 막아주기를 기원했다.

장을 담그고 빨간 고추를 띄워 놓음은 장맛을 나쁘게 하는 찌꺼기를 막아낸다는 믿음으로 인해서다.

동지에 붉은 팥죽을 먹으면 액운을 막는다는 의미가 있다.

아이의 돌상에 붉은 수수팥떡을 올리는 것도 아이가 무탈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기원의 마음이다.

 

▲ 지난 22일 동짓날에 끓인 동지팥죽


이렇듯 하얀 눈속에 수놓은 듯 달려있는 붉은 열매들도  번식을 위해 새들에게 돋보이려는 한편,

그 어떤 나쁜 기운도 막아내며 무사히 씨앗의 역할을 마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새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붉은빛을 나뭇가지에 달고서 자신들이 살아가는 산을 지키고 있는 붉은 단심인지도 모르겠다.

번식에 대한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들은 최대한의 모습으로 최선을 기원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오늘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저 높은 가지 위에서 붉은빛을 발하며 달린 열매들에게 내 소망을 아주 조금씩만 얹어 두고 싶다.

우리 아이들에 대한 금빛 소망을 걸어두고 싶다.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이 조금만 더 많았으면 좋겠다.

눈을 얹고 있는 둥근 빨간 열매들이 유난히 고와 보임은 그런 애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불경스런 자세로

나무 열매와 새들 사이에 나를 끼워보며 엉뚱한 생각으로 충만함을 채우고 있다.

 

이제 남은 날이 3일이 채 되지 않는 2022년을 붉은 단심으로 보내야겠다.

저만큼 걸어온 새해를 조심스런 마음으로 맞이해야겠다.

 

▲ 내소사 경내의 산수유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