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중순 어느 날 아침 9시,
지리산 성삼재는 막 번지기 시작하는 아침햇살에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껴안고 있다.
저 해는 분명 천왕봉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았겠지.
나무 사이로 깊숙이 파고드는 햇살에
나무들은 제 잎을 먼저 내 보이며 나를 환영하듯 반짝이는 길을 또박또박 걸으며 노고단으로 향했다.
노고단 고개에 이르면 노고단 정상으로 올라가는 문과,
지리산 종주를 시작하기 위해 통과하는 문이 있다.
고개라 이름 불리는 장소는 조금은 광활하다는 표현이 어울릴까 싶은데
산 속에서 만나는 넓은 곳이기도 하지만
그날따라 하늘의 공활함이 노고단 고개를 더더욱 넓게 펼쳐주고 있었다.
한참을 이리저리 거닐며 사진도 찍고 풍경을 감상하였다.
실로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특별함은 없지만
지금 순간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을 누리는 순간도 있다는 것이 삶의 묘미인가 보다.
반야봉, 천왕봉으로 가는 45km에 달하는 길에서
겨우 2.8km를 걷고 지능선으로 몸을 돌려 피아골 계곡으로 향한다.
지능선 이지만 지리산의 장엄한 주능선에 손톱 끝만큼도 모자람 없는 내리막길이 폭포처럼 내달린다.
그럼에도 나는 아름다운 빛으로 치장하고 있는 나뭇잎들에 정신이 팔려 쉼 없이 끌려 내려가고 있다.
이 나무를 보고 어쩜! 하면 저 나무가 바람에 나부끼며 손짓을 한다.
간혹 다듬어진 데크 길도 있었지만 태고 적부터 있어온 길처럼 있는 그대로의 돌길은
내 발걸음을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 알려 주지 않았다.
초록빛이 완전히 빠져나간 나무 본성의 빛을 보며
그들이 유혹하는 손짓에 내 발길을 어떻게 멈출 수 있겠는가.
이윽고 만난 한 작은 쉼터에 데크 벤치가 놓여 있다. 그곳에는 쉬어가라는 안내문도 있었다.
빵 한 조각과 텀블러에 담아온 따뜻한 계피 생강차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니 참으로 행복하다.
늘 바쁜 일상에 쫓기듯 살아가는 생활이지만
이렇게 틈새로 들어오는 작은 행복들을 놓치지 아니할 때 찾아오는 고요함은 참으로 감미롭다.
나를 살찌우는 보약이다.
옛 성인들은 산을 한 번 오르면 만 권의 책을 읽은 것과 같다고 하였다.
산은 진정 책과 연필이 필요 없는 생각의 교실이다.
왜 산은 멀어질수록 작아지고 점점 옅어지는 빛으로 보이는가.
여기까지 오며 일부러 먼 산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바라보며 걸었지만 아직도 모르겠다.
쉼을 멈추고 다시 배낭을 짊어지는데
단풍 나뭇잎 네 개 달린 작은 가지 하나가 팔랑~ 내 앞으로 떨어진다. 얼른 주웠다. 예쁘다.
옛날 중국의 두보(杜甫)라는 시인은
꽃잎 하나 떨어지면 봄빛이 그만큼 깎여나간다고 했는데
지금 단풍잎 하나 떨어지면 가을빛도 그만큼 옅어지는 걸까.
네 개의 단풍잎이니 오늘 내 앞에서 가을빛은 얼마만큼 옅어진 것일까.
오늘 이곳을 찾아온 내 걸음이 참 신통하다. 가을빛이 더 옅어지기 전에 찾아왔으니 말이다.
드디어 계곡을 만났다. 물소리는 진즉부터 들렸는데 계곡 모습은 보이지 않았었다.
아마도 숨어 들린 물소리는 지금 내 앞에서 보여주는 완전한 합주곡을 위해 나무 뒤에서 연습했을까.
이제 계곡의 집채만 한 바위를 만나니 물줄기는 폭포가 되어 타악기의 울림을 내고,
너럭바위를 만나면 제 몸을 치마폭처럼 펼치고 부드러운 현악기의 활이 되었다.
자잘한 돌들의 계곡에서는 돌돌 거리는 모습이 현악기의 피치카토를 울리는 주먹 쥔 손처럼 귀엽다.
이들의 합주에 계곡을 굽어보는 단풍나무들은 형형색색의 빛으로 조명을 내려주고 있으니
진정 완벽한 자연교향악단이다.
교향악에 심취해 걷는데 문득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연주회가 끝났나?
아니 벌써 피아골 대피소가 아닌가. 삼삼오오 모여 쉼터에 앉아 쉬고 있었다.
나도 한 자리에 앉으려는데 아휴! 다리가 너무 아프다. 왜 이제야 아픔을 알아차렸을까.
아,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는 산에서 받은 보약으로 아픔을 잊었었나 보다.
이제 2km만 걸으면 도착지인데…
피아골 계곡 연주회장을 뒤로하고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가는데 내 다리가 가기 싫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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