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전 토요일, 급하게 약속된 시간에 맞추어 가느라 허둥대며 조금 일찍 사무실에서 나오는 바람에 친구와 만남이 어긋났다. 물론 친구도 사전 약속이 없이 으레 내가 사무실에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찾아온 경우였다. 아마도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무언가 선물을 가지고 왔고, 그에 일부러 말하지 않고 온 것인데 그만 어긋난 것이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다음 날을 기약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로부터 어렵게 전해 받은 선물은 굴비 한 두름 이였다. 굴비는 번거롭지 않게 식탁에 올릴 수 있어 좋다. 노릇하게 구워 낸 굴비는 저절로 입맛을 당기게 한다.
조기는 생선 중에서도 맛이 좋기로 으뜸이다. 또한 제사나 차례 상에도 빠지지 않으니 절까지 받으며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조기를 소금에 절여 잘 말리면 굴비가 되어 입맛을 자극한다. 소금에 절여 말린 조기를 굴비라 하는 이름은 한글표기이지만 한자로 표기하는 이름 屈非와 병행하여 얽힌 이야기가 있다.
고려 17대 인종 때 이자겸이 자신의 셋째와 넷째 딸을 왕에게 시집보내고 세도정치를 하던 중, 십팔자(十八子, 李:오얏 이씨)가 임금이 되리라는 말을 퍼뜨리고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같이 음모했던 척준경의 배신으로 발각되어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고 한다. 이자겸은 이곳에서 먹은 조기 맛이 너무 좋아 상하지 않게 소금에 절였다 말려 임금에게 진상하였다. 이자겸은 이 진상이 결코 자신의 잘못을 용서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굴비(굽을屈 아닐非: 굽히지 않겠다.)라고 써서 한양으로 보냈고 이에 굴비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뜻을 굽히지 않겠다.’ ‘비굴하지 않겠다.’ 라는 의미를 강조하며 살아온 것이 어디 한 두 번일까. 이자겸이 맛있는 음식을 임금에게 보내면서 비굴함이 아니라고 역설했듯 자신의 행동이 비굴하게 보이는 것처럼 속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옛날 일을 떠 올리다 보면 혼자 얼굴 붉어지는 일도 있고 속상한 일이 있기도 하다. 나에게도 비굴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은 일이 있었으니 어머니와 관계된 일로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지곤 하는 사연이 하나 있다.
전주의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그 때 당시 중학교에 입학한 남동생과 자취를 하게 되었다. 부모님의 생활근거지를 떠나 도시로 나왔기 때문이다. 자취를 하다보니 그 집은 학교와의 거리가 너무 멀었고 주위 환경도 좋지 않아 집을 옮겨야 했다. 옮기기로 했지만 막상 적당한 집을 구할 수 없어 새로운 집을 구 할 때까지 작은집에 들어가 있기로 하였다. 하지만 작은 집 역시 방이 여유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촌과 방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여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기에 작은 집의 눈치가 보이는 것은 당연하였다.
어머니가 오셔서 우리의 짐을 날라 주셨다. 자식을 위해서는 무엇을 못하실까. 사실 우리 어머니는 큰며느리로 시집와서 시동생들을 다 가르치셨다. 그 작은아버지도 그렇게 서울사대를 졸업시켰고 그 후, 당시 일류라 칭하는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계셨기에 우리 어머니를 깍듯이 대해온 작은집 식구들이다. 한데 그 날 만큼은 우리 어머니는 내가 보기에 너무나 작은 모습이셨다. 자식을 위해 염치없이 두 명이나 작은 집, 작은 방에 맡기려하시는 그 마음으로 작은어머니에게 대하시는 행동이 그렇게 초라해 보였다. 순간 그 모습이 내 눈에는 비굴한 모습으로 굽히고 낮추시는 것 같아 울음이 왈칵 쏟아졌던 기억이 난다.
나는 어떻게 되든 너희들만 잘 되면 상관없다는 희생이셨을까. 나에게는 어머니의 행동이 초라하게 보였음에도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우리의 짐들을 정리해 주시고 가셨다.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지곤 한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베풀어 주는 것 보다 위대한 것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을 낮춤으로 자식들에게 조금이나마 편리함을 챙겨 주신 것이다. 얼마 후, 집을 구해 다시 이사를 나와 우리들만 지낼 때의 어머니는 온갖 반찬거리를 해 오심으로 그렇게 우리를 또 챙겨 주신 것이다.
드넓은 바다를 유영하다 어느 날 갑자기 육지로 끌려와 소금에 절여져야 했던 조기는 얼마나 쓰라리고 아팠을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했던 비굴함을 잠시 소금에 숨죽이며 받아들였기에 굴비가 되어 더 귀한 대접을 받고 있음에 분명하다. 어쩌면 우리 어머니도 그 당시 당신이 지니셨던 당당함을 잠시 숨죽이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모습이 굴비 되어 나에게 깊이 각인 되었으리라.
내가 살아오면서 무언가 내 스스로의 행동이 희생적이다, 조금은 비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나의 어머니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쓸데없는 비굴함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마음을 가다듬곤 하였다. 어려움이 닥쳐와 느껴야 하는 절망을 감내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역량을 느낀다. 어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자기의 뜻을 세워 이겨 낼 때 조금은 초라해 보였던, 그래서 비굴하게 생각되었던 행동들이 빛을 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로부터 그 어떤 비굴함이 필요한 경우라면 나의 어머니처럼 희생하는 마음으로 이겨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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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2일에 우리 형제들 모두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 면회를 다녀왔습니다.
우리를 빤히 바라보시더니 바쁜데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시기에
어머니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니 뜬금없이 홍어가 잡수고 싶다 하시네요.
그러면서 사위가(제 남편) 예전에 사 주어서 맛있게 먹었다고 하시니
우리는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후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셔서
제대로 드실 수 없는 상황이기에 우리의 마음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며칠 어머니 생각을 하며 지내노라니
오늘 아침 지방지에 어청도에서 홍어가 많이 잡힌다고,
흑산도 홍어보다도 맛이 좋다는 기사를 보고 어머니 생각에
예전, 약 10년 전 추석무렵에 썼던 글이 생각나 다시 올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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