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 홀로 한라산을 돈내코 코스로 오르려고 작정한 날이다.
등산 배낭을 잘 준비해 두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자꾸만 이것저것이 더하여 챙겨진다.
하니 새벽부터 부스럭대기가 미안했지만
여행지에서의 부산함에는 미안함도 당연함으로 받아들이는 너그러움이 있을까
한라산은 백록담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 방향에서 오르고 내려갈 수 있는 등산로가 있다.
일찍이 가장 긴 코스인
동쪽방향인 성판악에서 올라 북쪽 방향인 관음사로 다녀오면서 백록담을 바라보았고
작년에는 서쪽의 영실에서 서북쪽인 어리목으로 하산하였었다.
오늘은 남쪽의 돈내코에서 서쪽 영실코스로 내려올 계획이다
이리하면 한라산을 오르는 전 코스를 걸어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 생의 마지막일 수도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믿음에
이참에 제주도에 온 김에 꼭 다녀오리라고 작정했었다.
식구들은 따로 오늘 일정을 소화하고
나는 호텔에서 택시를 불러 돈내코로 향했고 아침 6시 50분에 도착했다
넉넉한 시간을 두고
오후 3시에 영실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돈내코는 예로부터 돈내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사철 맑은 물이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지금도 돈내코에는 원앙폭포로 유명한 유원지가 있을 뿐 아니라
옛날에는 야생멧돼지들이 물을 마시러 내려오는 계곡이었기에
돈내코라는 지명도 돗(돼지), 내(하천), 코(입구)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이라고 한다.
돈내코 탐방로는 자연휴식제로 1994년에 이 길을 통제하게 되었는데
15년이 지난 2009년에 다시 열렸다고 한다.
하지만 남벽분기점에서 백록담까지 이르는 700m 구간은 여전히 출입금지로 이어지고 있다.
백록담은 바라볼 수 없지만
남벽분기점에서 백록담을 에워싸고 있는 백록담벽을 바라보며 윗세오름까지 이어지는
약 2.3km의 구간은 한라산의 절경 중 절경이라는 소문을 익히 듣고 있었지만
너무 긴 코스와 15년 동안 닫힌 탐방로의 울창함으로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등산로라는 위험부담에 마음을 쉬이 열지 못하고 있었다.
탐방시작점인 시온동산은 해발 430m, 탐방안내소는 해발 500m 이니
1,700m의 윗세오름까지 1,200m 를 올라야 하는 여정이지만
국립공원 안내도에 따르면 난이도는 B급이라 하니 도전해볼만 한 것이다.
진정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묘지 사이로 걸어가려니 조금 으스스 했지만
묘지 사이마다에 핀 엉겅퀴의 진한 꽃분홍빛 꽃이 나를 안심 시킨다
“그래, 도전해 보는 거야”
늘 하는 다짐이지만
이젠 다시 이곳에 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용기가 나며 더욱 세심하게 느껴보고 싶은 조심스런 마음이 솟아난다.
약 50m를 올라야 돈내코탐방안내소를 만나는데
오르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아, 서귀포시가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차분한 모습이다.
뒷걸음으로 천천히 올라가노라니 보이지 않는 자연의 숨결이 전해온다.
아! 참 좋다!
몸을 돌려 길을 만나니 문득 계단이 나타난다. 오늘 만나는 첫 계단이다.
한라산의 탐방로계단은 계단 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한쪽에 노란색이 칠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 고비 돌아서니 돈내코탐방안내소가 보인다. 그냥 단정해 보인다.
산을 찾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산의 식물들 보호를 위해 노력하는 참 고마운 분들의 근무처인데 인기척이 없다.
배낭을 잠깐 내려놓고 앞으로 3시간 여 동안은 만날 수 없는 화장실에 다녀왔다.
다시 배낭을 질끈 메고 진정한 한라산 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지금 이곳이 해발 500m 라니
오늘 나의 목표인 남벽분기점 까지 1,100m 를 더 올라가고
다시 100m를 더 올라 1,700m 인 윗세오름까지 올랐다가 영실로 내려오는 긴 여정이다.
국립공원의 장점은 길 안내표시가 정확하여 길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오늘 주말이니 한 사람이라도 만날까 싶어 천천히 걸었다
15분이면 도착한다는 밀림입구까지 30분을 걸어도 등산하는 사람이 없다.
밀림입구로 막 들어서려는데 남편의 걱정스런 전화가 온다.
거짓으로 몇몇 사람을 만났다고 안심시키고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지체되면 아니 되겠기에
더 이상 기다림 없이 내 페이스대로 걸음을 걷기로 작정한다.
앞으로 2시간 동안은 하늘을 볼 수 없는 숲길을 걸어야 한다는 글들을 보았기에
하늘 보다는 주변 식물들과 다듬어지지 않은 돌길을 걸으며 땅을 바라보기로 한다.
얼마나 안온하지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함 속에 새소리만 더욱 낭랑하다.
눈으로 보는 것뿐 아니라,
소리와 냄새와 촉감으로도 숲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문득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알았다고 해서 말로 표현 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까
문득 이 숲이 지닌 기운 속에는
이 숲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든 식물들 개개의 냄새를 품고 있을 것이다.
고요함 속에서 새벽 숲의 내음을 맡는 일은 나에게 퍽 익숙한 일이다.
썩은 물통은 예전에 주민들이 버섯을 재배하려고
물 마련을 위해 파 놓은 웅덩이의 고인물이 썪어 습지처럼 변한 곳이라는데
숲속에서의 습지는 생물들의 보고라 알고 있으니 새롭게 바라본다.
'살채기'는 제주어로 사립문을 말하며
예전에 한라산 일대가 방목지대였을 때 말과 소가 함부로 다니지 못하도록
나무로 엮어 만든 문이며 '도'는 입구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아마도 저 계곡을 경계로 막아 놓은 듯싶다.
대피소는 으스스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갑자기 만난 눈, 비, 바람을 피 할 때는
더없이 소중한 장소가 될 것 이라는 생각이 드니 반갑기조차 하다.
자연 바위를 오브제 삼아 지은 곳 이라면
조금 더 건축의 묘미를 살리고, 관리를 하면
한라산 속의 예술작품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혹시 어디 빗자루가 있다면 쓸고 싶어 두리번 거렸지만 보이지 않았다.
하산을 하면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피에 들어가
빗자루 하나쯤 비치해두면 지나는 둥산객이 정리할 수 있을거란 의견을 올려 봐야겠다고 다짐한다
하늘도 보이지 않았던
초록 숲을 벗어나
마냥 주저앉아 놀고 싶은 봄동산 같은 고원지대에서
작지만
고고한 품새로 살아가고 있는
흰구슬봉이~
흰그늘용담 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고운 꽃을 만났다.
그렇구나
이 높은 곳이 한없이 아늑함으로 느껴진 이유는
바로 고운 꽃이 있어서였구나
봄 숲, 한라산의 봄 숲이 그리웠던 까닭은
보아주는 사람 없어도
묵묵히 예쁜 모습으로 피어나는 작은 꽃,
그 모습을 닮고 싶었기 때문이다.
표시석 뒤로 왼쪽은 알방애오름, 오른쪽은 방애오름능선이다.
빨간 깃발 두 개를 지나면 백록담에 이르는 700m 길로
이 길을 통제하기 위한 남벽통제소, 안에 근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근무자는 돈내코에서 제일 먼저 등산하는 사람과 함께 올랐다가
제일 마지막으로 내려가는 사람과 함께 하산한단다
저 분들의 수고로움이 한라산의 자연을 지켜 줄 것이니 참으로 고맙기만 하다.
사람이 이렇게 반갑다니!!!
이 사람들은 나와 반대 방향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돈내코로 하산하는 것이 아니고
윗세오름으로 되돌아가 각자의 방향으로 하산하는 사람들이었다.
딱 한 팀, 두 명만이 돈내코로 내려갈 것이라며
나한테 이것 저것을 물어오는데 괜히 뿌듯하였다.
이제 이곳에서 윗세오름까지 걷고
그곳에서 영실까지 내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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