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둘, 셋, 넷, 다섯, …… 열다섯.
현관문을 열고서부터 방 끝까지의 내 걸음 수는 딱 열다섯 걸음이다.
이 좁은 공간에
신발장, 화장실, 싱크대, 작은 옷장
그리고 반원형 베란다에 세탁기와 보일러가 설치되어있는 곳,
내가 지금 까끔살이를 하는 아파트형 원룸이다.
오밀조밀한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남편은 자꾸만 어디론가 여행을 온 기분이라고 한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 온 날은 지난 16일,
이사를 마치고 나자마자 강한 바람과 함께
때 아닌 눈보라가 몰아쳤기에 많이 어설픈 마음이었는데
이삿짐을 옮기는 동안 따뜻해진 방 온도가 어찌나 좋은지
금세 안온한 마음이 들면서
이사하는 날까지의 피곤이 풀어지면서 잠이 쏟아지는 것이다.
옛날 뜨뜻한 구들장 방에서 잠들 듯 그렇게 자고 나니
이 공간이 아늑함으로 정이 팍 드는 것이다.
이곳이 없었다면 어찌했을까.
단기 거처용으로 방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의 연약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병통이겠지만
눈 깜짝할 새에 스쳐 지나갈 그런 그리움 한 조각이 이 공간에 스며들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작은 공간이 그지없이 고맙기만 하다
그래~ 이제 약 한 달 보름, 이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우리 집은 시공을 맡겨둔 업체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야말로 대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준비하는 지난 2개월여 동안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맞추기도 하고, 변경도 하면서 많은 고심을 했다.
집의 내부구조와 재료 선택을 마치고 업체와 계약을 완료하고부터는
집안의 짐 정리와 임시거처를 구하고
이삿짐센터와 계약하는 등 모든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없었다.
이에 업무적으로는 연말을 맞이하고 보니
연말정산과 각 기관에서 요청하는 연말 자료에 대비하느라
정말 내 몸이 두 개였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다.
그나마 설 명절 연휴가 있어 나에게는 최고의 금쪽같은 시간의 선물이었으니
욕심 부리지 말자, 양보하자, 순리대로 하자며 늘 주문을 외우며 모든 일에 임했다.
어쨌듯 시나브로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씩
내 생각과 계획대로 해결돼가니 그 또한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이제 공사 진행을 지켜보기만 하면 될 터이니까.
오랜만에 일요일 오후 공원산을 올랐다.
햇살은 봄을 머금고 있지만 바람은 아직도 겨울을 품은 듯 차갑기만 한데
양지바른 한 곳에 봄까치꽃이 꽃을 피웠다
파르스름한 얼굴 빛으로 아직은 추워요~ 하면서도 해맑은 모습으로
무언가에 얽매여 있는 듯싶은 어설픈 내 마음을 화들짝 깨워준다.
산 능성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두 시간을 걷고 나니 몸도 마음도 가뿐하다
산을 내려오니 주차장 한 곳에서
직접 농사지은 농산물을 가지고 나와 판매하시는 분들이 계셨다.
싱싱한 이것저것을 사고 싶은데
최소 양으로 브로콜리, 파프리카, 견과류 등을 사 가지고 왔다.
살아가노라면 쌓이는 것이 생활용품이고
그에 사용 빈도가 낮은 것들에 대한 취사선택의 어려움을
톡톡히 경험한 요즈음이기에 이제 한 달 후의 재 이사를 생각하면서
많이 사서 먹다 남으면 짐이 될 것 같으니 조금씩만 구입하면서
지금부터 또 정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진정 이 어려운 시국에 여행의 꿈도 못 꾸고 있는데
이렇게 나는 생활여행을 하며
나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공간을 나름대로 꾸미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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