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달력상으로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첫 눈이라도 기대해 볼만큼 하늘이 잔뜩 내려 앉은 날,
에움길을 돌아서니 나뭇잎을 모두 떨어내고 빈 가지로 서 있는 나무들이 추워 보인다.
애처로운 모습으로 떠나는 것들이 더없이 아름다울 때가 있으니
요즈음의 나무들이 그런 모습이 아닐까.
그 중, 가장 마음을 끄는 것은 감나무이다.
잎을 다 떨고 빈 가지로 서 있는 감나무 꼭대기에 달린 감 몇 알이 유난히 선명해 보인다.
늦가을이 되면 온 산과 들에는 열매들로 가득하다.
번식을 위한 씨앗의 역할로 맺은 열매들이라 할 수 있지만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요즈음의 감나무에는
꼭대기에 달랑 몇 개의 감이 달려 있음으로 그 존재감이 더욱 뚜렷해지기도 한다.
너무 높아 딸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남겨진 것들에
까치밥이라는 깊은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음은,
자연에 의지하고자 하는 양보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자연이 주는 소중함을 우리의 생활 깊숙이 끌어 놓은 옛사람들의 지혜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정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자신의 열매를 새들에게 먹을거리로 내주고,
빈 들녘에 고고한 자태로 멋진 풍경을 이루어주면서
다양한 쓰임새를 갖춘 감나무를 옛사람들은 ‘오상(五常)’이라 극찬했다.
넓은 잎은 글씨를 쓸 수 있으니 문(文)이요,
단단한 재질의 특성으로 화살촉을 만들 수 있으니 무(武)가 되며,
열매 안팎의 빛이 붉은빛으로 일치하니 충(忠)이고,
단단한 것을 씹지 못하시는 부모님께 드릴 수 있으니 효(孝)이며,
가을 지나 서리가 내릴 때까지도 변함없이 열매가 달려 있으니 절(節)이라는 이야기다.
자연과 인간은 상호 존중하며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임에
자연에 빗대어 우리의 마음을 전하는 일처럼 따스한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한 자리에 서서 말없이 내실을 기하는 자연에 의지하고 바램을 얹어 두는 일은
자연스레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정서이기도 하다.
나는 빨간 감이, 아니 가을 산을 장식하는 빨간 열매들의
각자 지닌 특별함에서 빨강의 의미를 찾아보고 싶다.
빨강은 정열이고 일편단심(丹心)이다.
도장을 찍으며 약속을 나누는 인주의 빛도 빨강이다.
임금의 옷 빛을 나타내는 빨강은 성역이다.
뭐니 뭐니 해도 빨강은 재앙을 물리치는 빛이다.
아들을 낳으면 금줄에 고추를 끼워놓고 삿됨을 막아주기를 기원했다.
장을 담그고 고추를 띄워 놓음은
장맛을 나쁘게 하는 찌꺼기를 막아낸다는 믿음으로 인해서다.
동지에 붉은 팥죽을 먹는 것에도 그런 의미가 있다.
아이의 돌상에 붉은 수수팥떡을 올려야 한다는 속설도
아이가 무탈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기원의 마음이다.
이렇듯 가을 산을 수놓는 붉은 열매들은 어쩌면 번식을 위해 돋보이기 위해 선택한 빛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어떤 나쁨도 막아내며 무사히 씨앗의 역할을 마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렇게 붉은빛을 나뭇가지에 달고서
자신들이 살아가는 온 산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번식에 대한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들은 최대한의 모습으로 최선을 기원하고 있다는 믿음이니
달랑 남은 몇 알의 빨간 감이 유난히 고와 보임은
그런 애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곁을 지나면서 나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소망을 걸어 본다.
저 높은 가지 위에서 붉은빛을 발하며 달린 열매들에
내 금빛 소망을 아주 조금씩만 얹어 두고 싶다.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이 조금만 더 많았으면 좋겠다.
진정 가을은 떠나는 계절이 아닌 소망을 띄우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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