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부터 비가 계속 내린다.
장맛비라고 했는데 억센 빗줄기가 아닌, 차분한 빗줄기가 며칠을 쉼 없이 내리고 있다.
그냥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편안해진다.
용케도 아침, 저녁 산책시간에는 더 가느다란 줄기로 내려주니
가볍게 우산을 받쳐 들고 빗속을 하염없이 걸을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자꾸만 그냥 편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우선하니 아무 것도 하기 싫다.
무얼 할까~~ 하릴 없이 책꽂이 앞에서 책등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한 때 엄청나게 독서를 했었는데 이제는 일 년에 몇 권정도 들썩 거릴 뿐이다.
뽑아든 책이 2010년에 발간한 김훈 작가의 ‘내 젊은 날의 숲’ 이다.
뽑아들고 책장을 주르륵 펼쳐보니
포스트잇이 곳곳에 붙여있고, 간혹 연필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으니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흔적일 것이다.
그런데도 도대체 이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블로그나 내 노트에 감상 글을 적어 놓기도 하는데
어느 곳에도 이 책의 흔적은 없었다.
10년 전의 기억을 잊은 낡은 책을 새롭게 읽기 시작했다.
10일부터 오늘, 15일까지 읽었다.
김훈 작가님의 문체는 간결함이 매혹적이다.
하니 작가의 책 다수가 내 책꽂이에 꽂혀 있으니 뿌듯하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작가는 2009년 가을부터 2010년 초여름까지
휴전선이남 지방을 여행 했었다고 한다.
이 책은 아마도 그 시간들의 느낌을 엮은 이야기들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원초적인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는 38선 가까운 숲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참혹한 전쟁의 흔적으로
젊은 병사들의 유해를 품고 있음을 세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휴전선에 맞닿은 민통선 마을과
그곳 지역에 어쩔 수 없이 살아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풍경속의 풍경으로 읽히면서 내 안에서 풍경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했다.
어쩜 매일 숲길을 걷고,
그렇게 산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마음을 쏙 빼앗아 가는 내용들인데도
왜 나는 전혀 기억을 못하고 있는지 참으로 의아스럽다.
주인공(여자) 나는 디자인회사에서 건축물의 구조를 세밀화로 그려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 불황으로 이어지면서 퇴직금도 못 받고 2월 초에 사직을 했다.
실직상태는 오래 가지 않았다.
2월 하순께 계약직 공무원 공채에 선발되어
민통선 안 국립수목원의 전속 세밀화가로 채용되었다.
계약기간은 연말까지였지만
주인공은 성실히 임무를 하면서 민통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민통선 마을의 이야기,
민통선 안의 수목원을 가꾸는 사람들의 이야기,
최전방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들~~
무엇보다도 계절 따라 달리 자라는 나무와 식물과
그들이 피워내는 꽃들의 빛깔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눈이 번뜩 뜨였지만
“꽃의 색깔에는 어떤 구조적 또는 종자학적 필연성이 있는가?
꽃은 영원히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 않는다.“ (p82)며 결론을 짓고 있으니
서운하기도 하고 한편 다행이기도 했다. 꽃들의 신비가 벗어지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4계절을 거치는 동안의 숲의 변화에서
삶의 본질을 읽어내는 작가의 깊은 영혼에서 나를 찾기도 하고, 만나기도 했다.
책 속에서
나무의 줄기에서 늙은 세대의 나이테는 중심 쪽으로 자리 잡고,
젊은 세대의 나이테는 껍질 쪽으로 들어서는데
중심부 늙은 목질은 말라서 무기물화 되었고, 아무런 하는 일이 없는 무위의 세월을 수천 년씩 이어가는데
그 굳어버린 무위의 단단함으로 나무라는 생명체를 땅위에 곧게 서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p87)
나무의 삶과 죽음은 구분되지 않는다고.....
봄이 다가오면 목련의 겨울눈이 부풀어서 벌어진다.
그 안에 빛이 고이고 빛에 실려서 꽃잎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벌어지는 겨울눈 속에 고이는 밝음과 그 쟁쟁쟁 소리를 그리는 것이
내 세밀화에 부과된 임무였다. (p116)
숲에서, 나는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 앞에 있었지만,
그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세밀화는 그 기웃거림의 흔적이었다. (p120)
아침에 그리려다 못 그린 패랭이 꽃잎이
햇볕을 받으면 쟁쟁쟁, 환청을 울리듯이,
이 뼈(발견된 유해)를 그리려면 쟁쟁쟁 울리는 기운을 그려내야 할 것이었다. (p172)
책을 읽고 쓸쓸한 마음으로 호숫가를 걷노라니
문득 비 개인 하늘에 붉은 노을이 번지고 있으니
땅위의 풍경과 호수위의 풍경이 데칼코마니를 이루며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내 늙은 날의 푸념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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