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뒷산을 올랐다.
산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는 나무들이
피워내는 꽃모양이 날마다 달라지는 봄 풍경은 그대로 축복이다.
내 아무리 무심하려해도 활짝활짝 웃어 제키며
나로 하여금 가슴 뭉클케 하는 저 힘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코로나 때문에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지만
꽃들의 세계에서는 인간사는 세상에 대한 무관심은 당연함일지도 모르겠다.
산등성에서 바라보는 은파 호숫가의 벚꽃들이 구름 성을 이루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기를 강력히 권장하고 있는 요즈음인데도
꽃들의 유혹에 차를 몰고 나온 사람들로 인하여 차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산길은 한적하기 그지없다. 꽃에 흥이 났을까.
저쪽 산봉우리에서 한 남자가 목련화 노래를 목청껏 부르고 있다.
사람들이 없으니 간혹 틀린 음정도,
고음에서 찢어지는 목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소음처럼 들려오는 노래를 듣노라니 문득 오늘 읽기를 마친 이방인이 떠오른다.
지난번 페스트를 읽기위해 책을 구입하면서 이방인과 세트로 구성된 것을 주문했었다.
이방인 역시 내용이 생각나지 않았는데 읽어가노라니 주인공이 살인을 했고
그렇게 된 까닭은 햇빛 때문이라고 대답한 것이 기억이 나면서 읽는 속도가 빨라졌다.
주인공 뫼르소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자기 느낌이나 생각을 그대로 말을 한다.
미사여구를 붙이지 못하니 말이 짧고 그러니 당연히 말 수가 적은 것인데
사람들은 말이 없고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하지만 어머니의 나이도 모른다고 한다.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기를 ‘아뇨’ 한마디로 거부한다.
이런 뫼르소가 친구의 일에 얽히면서 아랍인을 권총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재판과정에서 모든 것에 무관심한 뫼르소의 행동은 불리하게 적용된다.
즉, 검사는 뫼르소가 냉혈적인 감정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살인을 하였다는 것으로 완벽한 메카니즘을 형성하여 사형을 선고 하는데도
뫼르소는 그는 자신의 감정들을 과장해 표현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한 행동들에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무관심한 순진한 사람, 이방인인 것이다.
그 무관심은 한편 대단한 적응력으로 변해
자신이 죄인이라고 느끼지 못하면서 감옥에서도 편안함을 느낀다.
작가는 이방인의 정의를 이렇게 무관심한 의지의 소유자들임을 암시한 것일까?
그러면서 재판과정에서 단순히 성격 때문임에도
사건과 연계지어 묶어버리는 부당함을 알려 주고,
인간은 그런 불합리에 당당히 맞서면서, 자신의 무관심에서 벗어나
인간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알려주는 것 같았다.
인간 세상에 무관하게 피어나는 꽃들도 이방인이고
산길을 걷는 사람들 무관하게 목청껏 노래 부르는 사람도 이방인일 수 있을 것이니.
그렇다면 이방인은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지금 순간 조금 헷갈린다.
'감상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에게 갔었어 (0) | 2022.03.24 |
---|---|
내 젊은 날의 숲 (0) | 2020.07.15 |
페스트..... (그냥 읽었다.) (0) | 2020.03.23 |
쥐띠 해를 맞이하여~~ (0) | 2020.01.02 |
지붕위의 뒤엉킨 노박덩굴 (2) | 2019.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