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보통 날씨가 아니다.
강한 햇살에 그늘만 찾아들고 싶은 마음으로 들어 선 장미공원의 화려한 꽃들에 한 순간 꽃들의 예쁜 모습을 바라보기 보다는 서로 어우러져 빚어 놓은 풍경들에 압도당했다. 입장료가 오천 원으로 조금 비싸다 생각했는데 이 꽃들을 관리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것이라 여기니 그럴만하였다.
장미공원을 나와 점심식사를 하러 석곡으로 향했다. 흑돼지 요리가 제주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도 유명하다하여 공원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석곡으로 가야한다고 알려준다. 40여분이 소요된다고 하여 조금 망설여졌지만 어차피 나왔으니 드라이브도 할 겸 다녀오기로 했다.
우리나라에서 드라이브하기에 가장 좋은 길 중 하나로 뽑힌 국도 19번 길을 타고 달리는 길이다. 섬진강을 곁에 두고 달리다가 보성강과 섬진강이 만나는 압록에서 보성강을 따라 가는 길이었다. 두 강물은 압록에서 합류하여 섬진강이름으로 하동을 거쳐 바다로 나가는 물길이다. 도로변에는 자전거 길도 조성되어 있으니 문득 저 강 따라 자전거로 달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일어난다.
스치는 산등성마다 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나무들의 초록기운이 와락 밀려왔다가 차를 따르지 못하고 뒤로 처지면서도 어느새 다음 나무들에 바통을 이어주고 있으니 굽이도는 길을 달리는 기분이 마냥 좋다. 마치 나무로 둘러싸인 숲길을 달리는 기분이다. 무한 리필로 내려주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는 그들이 진정 사랑스럽다.
어느 곳에서 태안사라는 안내표지판을 보았다. 보성강을 가로 질러 가는 곳이란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되돌아오는 길, 구례로 향하면서 들려가기로 하였다.
곡성 곳곳에 메타세콰이어 길도 많았다. 이 나무는 발음하기가 참 어렵다. 하여 우리 이름은 없는 것일까 하며 궁금해 하던 차 ‘수송’(水松)이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수송이라 부르지 않고 있으니… 이름에서 이국적인 느낌을 받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구에서 멸망한 것으로 알았던 나무가 중국에서 발견된 후, 은행나무와 함께 '살아있는 화석'의 표본으로 살아가면서 엄청난 번식을 하면서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다하니 참으로 놀라운 나무다. 하니 부르기 어려운 이름일망정 생명력의 신비와 함께 멋을 지닌 가치로 인정을 해야 할 것 같다.
▲ 이곳에서도 한참을 굽이 돌아 가는 길
▲ 제주도에 많은 방사탑?처럼 돌로 쌓은 탑
석곡이라는 동네? 마을에 이르러 흑돼지 석쇠구이로 점심식사를 했다. 1인분 12,000원이었다. 돌아오는 길 남편에게 천천히 달리자고 하였다. 걷는 길이라면 해찰도 많이 하면서 잔잔한 꽃들도 만나곤 하겠지만 차로 달리니 자잘한 것들을 나도 모르게 소외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태안사를 가기위해 보성강 다리를 건서서도 한참을 달렸다. 이 깊은 곳에 마을들이 제법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보성강을 가로 지르는 다리들이 여러 개 있음에 건너편에 인가도 없는데 웬 다리들을 많이 건설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다시 태안사 들어가는 숲길로 접어들어서도 굽이굽이 들어가다 충혼탑을 만났다. 무슨 충혼탑? 하며 잠시 내려 보니 경찰 충혼탑이었다. 아, 오늘이 현충일인데.... 탑 앞에서 잠시 묵념을 하였다. 오늘 행보를 값지게 해 준 우연한 만남의 충혼탑이 고마웠다.
▼ 경찰충혼탑
천년고찰 태안사 입구에 국가보훈처에서 지정한 경찰충혼탑이 있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태안사를 찾아가는 입구에서 만났으니....
6·25 전쟁 당시 전사한 경찰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탑인데
오늘 현충일임에도 무척이나 조용하니 거의 잊혀진 것일까.
요즈음 시국에 편승하여
다시금 재조명되면서 혼령들에 위로가 되기를 작은 마음으로 기원했다.
▼ 능파각
조선 후기의 건물로 태안사의 금강문으로 누각을 겸한 일종의 다리건물이다.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하는 ‘능파(凌波)’라 이름 하였으며, 6.25 동란 시 태안사 모두가 불탔지만 일주문과 이 능파각만 남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자동차로 가느라 저 다리를 건너 만나는 이쁜 길을 걷지 못했다.
▲ 능파각에서 부터 이 길을 걸어 일주문에 이른다.
태안사 입구에서 절까지 2km 정도로 아늑한 분위기만으로 충분히 힐링이 되는 듯싶다. 태안사(泰安寺)는 742년(경덕왕 1)에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대안사(大安寺)로 불렸으며 선암사 ·송광사 ·화엄사 ·쌍계사 등을 거느려 꽤 오랫동안 영화를 누렸던 사찰로 혜철선사와 도선국사가 득도한 정양(靜養) 수도의 도량이다. 조선시대에는 효령대군이 머물며 왕가의 온당으로 삼았다
동리(棟裏)’는 오동나무숲을 뜻하며
동리산은 봉황이 먹고 산다는 오동나무 열매가 열린 숲이 있는 산
사찰 안에서 바라보는 일주문 현판에는 봉황문이라 쓰여 있다.
이름에 봉황이 들어가면 풍수와 관계가 있는데
태안사는 봉황이 날개를 안으로 접으면서 둥지로 들어오는 형국의 명당이라고 한다.
▲ 일주문 정면(위)과 후면(아래)
사찰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만나는 문이 일주문이다.
한 개 문의 기둥이 일렬로 서 있어서 일주문이라고 하는데
한 개를 강조하는 것이 일주문의 존재의 의미라고 한다.
보통 일주문 현판에는 ㅇㅇ산 ㅇㅇ사라고 쓰는데
이는 근처의 주산에서 가장 좋은 명당자리에 절이 있음을 나타내는 뜻이라 한다.
▲ 태안사부도전
▲ 광자대사탑 비
950년(고려 광종 1)에 세워진 탑비로 보물 제275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 승려 광자대사 윤다(允多)의 탑비이다.
비문의 내용은 그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 효공왕의 측근에서의 불심에 대한 문답,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내용 등이 실려 있다고 하는데 현재는 많이 파손되었다고 한다.
▲ 광자대사탑 (보물제276호)
광자대사는 대안사(태안사)를 두 번째로 크게 번성케 한 스님으로,
경문왕 4년(864)에 태어나, 8세에 출가하였다.
전국을 다니다가 동리산에서 수도를 하였고,
그 뒤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계(戒)를 받아,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서 승려가 되었다.
혜종 2년(945)에 82세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광자’라 내리었다.
▲ 일주문, 부도전을 지나 경내에 들어가는 길
▲ 나뭇잎들이 돌계단 위에서 정양 수도하는 중....
▲ 보리자나무
절에서는 보리수라 부른다
이 나무 열매로 염주를 만든다고한다.
▲ 범종각
▲ 태안사를 나서며
절에서 내려오면서 동리산 태안사의 명당 자리에 서서 기를 받아 보았다.
우리나라에는 명찰이 많다. 자연의 원리를 바탕으로 세워진 사찰은 우리의 문화재이자 정신문화라고 말하고 싶다. 하루 몇 시간 동안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경치 좋은 곳에 들어선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마음의 휴식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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