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령치에서
바쁜 업무 일정이 끝난 16일 토요일 지리산 정령치에 올랐다.
정령치는 지리산 서북능선의 1,172m 에 위치한 고개다. 정령치란 이름은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씨 성을 가진 장군에게 성을 쌓고 지키게 했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 고개를 기점으로 해서 좌측(북쪽)으로 오르면 바래봉 까지 이어지는 길이며, 왼쪽(남쪽)으로는 만복대(1,438m)에 오른 후 성삼재(1,090m)로 떨어지는 길이다.
지난 봄 철쭉을 보기위해 언니와 함께 바래봉까지의 북쪽 길은 걸었지만 반대편 만복대 지나는 남쪽 길은 걸어보지 못했다. 오늘은 만복대에 올라보기로 하고 남편과 함께 출발했다. 각자의 차를 가지고 출발하여 정령치에 한 대를 주차하고, 또 한 대로 성삼재까지 내려가서 주차한 뒤 성삼재 ~ 고리봉 ~ 묘봉치 ~ 만복대 ~ 정령치로 내려오는 계획이었다. 산행 후, 정령치에 주차한 차를 타고 다시 성삼재까지 내려와 또 다시 각자의 차를 가지고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그만큼 높은 고개를 이어주는 대중교통이 없는 지리산자락의 길이 어렵기 때문이다. 정령치(1,172m)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곳이며 성삼재(1,090m)는 5번째로 높은 곳이다. 이 두 곳 고개는 고도감뿐만 아니라 경사도로서도 최고의 위치이며, 아름다운 곳으로도 2, 3위를 차지하는 높은 고개이다. 또한 가을이면 지리산을 오르지 않고도 가을 단풍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도로다.
그간 이 고개는 구경삼아 가족들과도 친지들과도 여러 번 다녀왔지만 산을 오르는 기점으로 삼는 경우는 두 번째였으니 기대감이 높았다. 그런데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남원에 들어서니 멀리 보이는 지리산의 주능선에 운무가 가득하다. 날씨도 썩 쾌청한 기운이 아니었다. 설마 태풍 탈림의 영향을 받는 것일까? 제주도만 영향권에 든다고 했으니 운무 속의 풍경도 일품인지라 그닥 걱정하지 않고 달려 정령치에 도착하니 주차장이 썰렁했다. 오전 8시는 이른 시간일까? 주말인데? 하는 의아심을 가지고 차 문을 열고나오니 세상에!! 바람에 날려갈 것 같았다. 진정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다. 조망 좋기로 유명한 정령치인데 오늘은 구름이 바람을 타고 흐르느라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추위가 느껴지니 참 난감했다. 이런 추위라면 산에 오르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이곳에서 왕복 1시간이 소요되는 정령치 습지에 먼저 다녀와서 그 후 사정에 따르기로 했다. 나는 여벌로 준비한 바람막이 옷을 겹쳐 입고도 그 위에 또 우의를 입었다. 보온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에 넥워머 까지 두르고 괴한 같은 모습으로 고개 마루에 올랐다. 정말 한 순간 내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러나 등산로를 바라보는 순간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이 바람에도 쑥부쟁이 꽃들이 가을을 보듬고 있으며 길손들을 반기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정령치 반대편 마을 풍경들은 평화로워 보이니 안심이 된다. 그래 지나가는 바람일거야. 워낙 기후변화가 심한 이곳이 아니던가! 위안을 하며 습지를 향해 걸었다. 아니!! 숲속에 들어서니 키 큰 나무들이 강한 바람에 맞서면서 키 낮은 초목들을 보살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안온한 느낌에 안심이 되면서 습지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숲속 깊이 들어갈수록 바람이 잦아든다. 아니 나무들이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잔잔한 꽃들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으니 사진기 초점 맞추기가 힘들었다.
▲ 산비장이와 쑥부쟁이
마애불상과 습지를 안내하는 표지판을 만났다. 지난 5월에는 이곳에서 곧장 바래봉을 향해 걷느라 주등산로를 이탈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이다.
곳곳에 반달곰을 조심하라는 안내문과 만났을 때의 행동요령이 적힌 플랭카드들이 보인다. 조금 무섭기도 하였다. 그런데 실제 상황이 되면 저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웃음이 픽 나온다. 어떻게 누워서 죽은 시늉을 하라는지… 지금 내 차림을 보면 반달곰이 먼저 도망할 것이니 걱정 없다.
▲ 산비장이
색깔이 정말 곱다.
잣나무가 울창하다 싶은데 곧 습지가 나왔다. 상상보다는 작은 습지에 고마리가 많이 피어 있었고 억센 풀이 많이 우거져 있었다. 내가 기대했던 특이 식물은 만나지 못했지만 정말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으니 1,200m 고지에 이런 습지가 있음에 놀라웠다.
▲ 고마리는 물을 정화시키는 식물이니
잘 자란 고마리가 정말 이 습지의 깨끗함을 알려주는 듯싶다.
▲ 며느리밥풀꽃
조성된 나무 테크를 따라 조금 더 오르니 마매불상이 있었다. 정돈이 잘 되어있는 인상을 받았다. 이곳은 개령암지로 사라진 암자 뒤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상군으로 보물 제112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었다. 12구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는 내 눈에는 2~3개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으니 역시 나는 그저 한낱 속세인 밖에 되지 않은가 보다. 그 보다는 암벽 틈에서 피어난 구절초가 더 예뻐 보였다. 얼굴모습과 옷 주름들의 처리된 모습으로 고려 마애불 수법이라고 한다. 또한 본존 아래쪽에 ‘世田(세전)’ ‘明月智佛(명월지불)’ 등의 글자가 남아 있다고 했지만 역시나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 가장 큰 불상을 확대해 보았다.
▲ 무슨 용도의 기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불상을 보호하려는 장치가 아닐까?
정말 얼마나 깊은 불심과 정성으로 이처럼 깊은 산중의 거대한 암벽에 불상을 새겨 놓았을까. 우리는 이런 흔적을 만나면서 이 산이 지닌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느껴볼 뿐이니 그저 잘 보존하면서 지켜나가는 일이 임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불상 전망대에서 한참을 서서 이리저리 감상하고 돌아내려오려고 몸을 돌리는데 전망대 난간에 큼지막한 잣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어쩜! 주위에 잣나무가 많은데 바람에 떨어졌을까? 주울까 말까 망설이다 집어보니 끈적거림이 심하다. 촉감이 좋지 않아 뭐가 잘 못 되었을까? 하면서 얼른 다시 놓았지만, 아니 이건 나에게 주는 선물일거야 하면서 들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온전한 잣송이를 만나는 일은 처음이다.
돌아오는 길 한결 마음이 놓여서인지 등산로 여기저기에 피어 있는 꽃들에 눈길이 주어진다. 정말 예쁘다. 숲길이 안온함은 이들의 부드러운 웃음과 고운 자태가 고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1시간여 동안 걸었던 숲을 벗어나 다시 고개 마루에 서니 바람은 여전했다. 하지만 추위는 많이 가신 듯싶으니 일단 산행에 나서보자며 성삼재로 향했다.
▲ 물봉선
▲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은 아직도 운무에 쌓여있지만
꽃들은 해맑기만 하다.
▲ 쑥부쟁이
▲ 미역취
▲ 미국쑥부쟁이
▲ 찔레열매
▲ 정영엉겅퀴
▲ 오이풀
▲ 멋들어진 미역줄나무
▲ 고마리
▲ 물봉선의 배웅을 받으며
성삼재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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