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으로!!

마음따라 발길따라

고택에서 조상의 삶을 음미하다.

물소리~~^ 2017. 8. 26. 15:30






▲ 농암종택 원경(遠景)

 

▲ 농암선생 영정


   병산서원을 들렀다가 체화정을 거쳐 청량산 자락 아래 도산면 가송리의 농암종택을 찾아 나섰다. 체화정으로부터 자동차로 1시간 30여 분 소요되는 조금 먼 거리였다. 그래도 모처럼 찾아 온 곳이기에 망설이지 않고 출발했다. 도산서원을 지나가는 길이었지만 시간 상 도산서원을 지나쳐 곧바로 달렸다.


점심이 애매하여 어쩔까 싶었는데 가는 길 중간의 한 음식점 주차장에 차들이 엄청 모여 있기에 맛집인 듯싶어 들어갔다. 정말 자리가 없었지만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시간인지라 일어서는 사람들이 쉬이 있어 자리를 잡고 순두부백반을 먹었다. 청국장과 순두부만을 메뉴로 하는 집인데 맛이 좋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거늘 점심을 먹고 나니 마음이 더욱 여유롭다. 낯선 길이 보여주는 풍경을 음미하며 달리는데 어디쯤에서부터 비포장도로로 들어가더니 계속 강줄기를 따라 간다. , 낙동강 줄기를 따라 가고 있었다. 농암종택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니


농암종택은 이곳 가송리에 자리하고 있다. 佳松은 이름처럼 아름다운 소나무를 일컬음이니 이 마을에는 아름다운 소나무가 많아 덩달아 마을도 예쁜 곳이라고 한다. 또한 청량산의 정기를 받으며 가송리 협곡을 끼고 흐르는 이곳 낙동강은, 낙동강 700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구간으로 도산9곡의 비경이 간직된 곳이라 하였으니 종택이 가까워질수록 눈과 마음이 자꾸 앞서 나간다.

 

 

 

 

▲ 종택 솟을대문 옆에 피어있는 상사화

종택의 위엄이 있어서일까. 꽃도 , 꽃이 품은 뜻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 종택 안에서 솟을대문을 바라보니...

뚝 떨어지는 산줄기가 종택의 대문위에 걸쳐있다.

산의 정기를 그대로 문 안으로 끌어들이는 듯싶었으니



농암종택은 500여 년 전쯤 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말년을 안동 땅에서 자연을 벗 삼아 소일했던 농암 이현보의 종택이다. 본래는 지금 있던 자리에서 남쪽으로 10쯤 떨어진 예안면 분촌리에 있었다는데, 안동댐 담수로 수몰지구가 되면서 건물 일부는 잠겼고, 다른 건물들도 안동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이전 되어있던 건물들을 농암의 17대 후손인 이성원 씨가 1976년 이곳에 새로 터를 잡아 건물을 옮겨 세웠다고 하였다.


 

▲ 솟을대문을 바라보고 그 자리에서 뒤 돌아서니 긍구당이 눈길을 잡는다.


 

▲ 종손가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사랑마루에는 선조임금이 농암가문에 내린 적선(積善)이란 어필이 걸려있다고 안내문에 있었지만 현재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 차마 사진을 찍지 못하고 먼 거리에서 맴만 돌았다. 임금이 직접 써 주신 것이라니 얼마나 자부심이 대단했을지

 

 

▲ 긍구당(肯構堂)

 

▲ 긍구당 담에서 머루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 긍구당 정면에서 바라본 녀던길과 우거진 나무에 가려진 낙동강

참으로 단정하다 


녀던길은 농암과 인연이 깊었던 퇴계가 생전에 안동과 청량산을 오가며 걷던 오솔길이다.

농암과 퇴계의 나이차는 무려 34세, 할아버지와  손자뻘이었는데도

서로 아끼고 존경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퇴계의 학문은 스승 없이 집대성한 것이라 하지만

문학은 농암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만큼 깊은 인연이 있었으니

늦게나마 퇴계가 걸었던 곳으로 이사 온 농암은 하늘에서 얼마나 반가워했을


 

긍구당 건물을 바라보는 순간, 조금은 우리 옛 가옥보다 조금 화려한?, 치장을 많이 한 건물처럼 느껴졌다. 긍구(肯構)조상의 유업(遺業)을 길이 이어가라는 뜻이라고 한다. 긍구당은 농암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장소로 농암 사후에는 농암종택의 중심건물이 되어 모든 문사(門事)가 여기서 결정되었다고 한다. 건물은 원형 그대로 몇 차례 중수했다고 하니 내가 조금 어색하게 느꼈던 감정은 옛 것 그대로가 아닌, 거기에서 비롯 되었나 보다. 


 

 

 

▲ 긍구당 창문

 


 

 

 

▲ 명농당


 

 

▲ 건물과 건물 사이의 문


 

 

 

▲ 분강서원 (농암선생을 享祀하는 곳)

 

▲ 서원의 본당

▼본당을 중심으로 동재, 서재를 배치함은 서원의 기본 배치이었던 듯. 

 

 

▲ 서원에서 바라본 낙동강▼ 

 

 

 

 

 

 

▲ 농암선생 신도비



▲ 폰카로 찍은 사진 (카메라와 화질이 다르다)

후손 이씨는 수몰을 피해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종택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해 10년 가까이 헤매다가 지금의 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자리를 찾아냈을까. 지족지지(知足之志)의 식견을 지녔던 조상을 둔 자존감이 그토록 강했을 것이다. 청량산과 낙동강이 어우러진 풍경이 정말 좋았다. 비 내린 후의 물은 탁했지만 산에 숨겨졌던 바위들이 그대로 옷을 벗고 강물에라도 뛰어들기라도 할 것처럼 바위 근육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음은 이 종택의 시조였던 농암이 찬양하지 않고는 못 배겼을 풍경이었다.



▲ 저 의자에 앉아 보고 싶었다.

고택을 샅샅이 바라보고 싶었지만 살림하는 집인지라 살금살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분강서원 지나 애일당 가는 곳의 방향표시판이 있었지만 서원 앞에서 그냥 녀던길을 따라 걸었다. 자연이야 그대로이겠지만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제 살던 곳을 남기며 자연과 더불어 지냈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 익모초

 


 


우리에게 집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살아가며 필요로 하는 1순위가 아닐까. 그러기에 그만큼 집착을 하고 좋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한 소유욕이라면 편안함과 자연스럽게 빚어지는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공간에 머물 수 있는 곳을 원하는 마음일 것이다. 오랜 세월 전해오는 우리의 전통가옥은 그렇게 우리의 정서를 확인시켜주는 곳이기에 더욱 애착을 가지고 지켜 나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옛 집 깊숙이 스며있는 우리의 정서를 배워 생활 속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농암종택을 둘러보노라니 한옥이라는 익숙함이 정겨웠고 균형을 이룬 건물에서 안정감을 보았다. 가지런한 장독대에서 정갈함이 보였고 마당 곳곳의 작은 조형물에서조차 아기자기함이 느껴졌다. 사랑채 누마루에 올라 비 내리는 풍경을 마음껏 바라보고 싶다. 마루에 엎드려 책이라도 읽고 싶음이 불쑥 올라온다. 누마루 밑의 공간은 숨바꼭질하기에 좋을 것 같고, 계절 따라 쓰이는 물건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둘 아늑한 곳이 되기도 할 것 같았다.


장독대 항아리에서 구수한 된장을 떠 저녁 찬을 만들어 보고 싶다. 앙증맞은 우물가에 앉아 밭에서 금방 따온 오이라도 씻어보고 싶다. 화단의 봉선화 꽃을 따서 손톱에 물들이고 싶다. 무엇보다도 매일 산이 바라보이고 매일 낙동강 물소리가 들려오는 곳이라는 것이 정말 좋았으며 그 길 따라 옛 선인들의 인연을 따라 그들의 흔적을 만나는 기쁨이 최고였다.


순간순간 솟아오르는 나의 감정으로 고택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새롭게 알았고, 새로움의 분위기를 즐기고 있으니 나는 공자가 말한 지호락의 3단계를 거쳐 나가고 있었다. 좋음을 느끼면서 지금을 살아가는 나의 삶의 방식을 향상시킬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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