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흥 천관산!
다소 먼 거리가 되어 우리는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하였다. 남편은 아침 준비가 번거로울 테니 일찍 나가 콩나물해장국밥 한 그릇씩 먹고 떠나자 한다. 나를 위한 작은 배려이다. 하지만 난 평상시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 새벽산행을 하지 않는 대신,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하였다. 유부초밥과 반찬 두어 가지, 물 등을 배낭에 넣었다.
7시 정각에 출발, 호남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자동차 전용도로에 진입하니 요즈음 계속되는 짙은 안개는 앞차의 미등조차 구부하기 어렵게 하니 불안한 마음이 되었지만 차츰 내 마음은 안개에 젖어지며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3시간 정도를 달려 고속도로를 벗어 날 즈음 안개는 걷히기 시작하였다.
10시 조금 지나 천관산 주차장에 도착, 멀리 보이는 산 정상이 안개에 싸여 희미하게 보이고 있어 햇빛에 반짝이는 갈대의 환상적인 모습에 대한 기대가 조금은 어긋날 것 같아 조바심 난다. 주차장에는 벌써 수많은 승용차와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있었다. 여기저기 왁자지껄한 소리에 금방 동화라도 되었는지 어서 빨리 산에 오르고 싶다.
억새평원에 가기 위한 등산코스는 안내판에 여러 방향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조금 돌아가더라도 완만한 길을 가기 위하여 영월정-체육공원-금강굴-천관사삼거리-환희대-연대봉-정원암-양근암을 지나 다시 영월정에 이르는 길을 택하였는데, 어휴! 초반부터 급경사였다. 평소 산행 덕분인지 난 별 무리 없이 오르고 있는데 남편은 아니었다. 숨이 차는지 퍽 힘들어 한다. 그 모습에 난 또 한 번 쿵! 무너지는 느낌이다. 한 번 병원 신세를 지고 난 후, 몸이 조금 불어서인지 그렇게 잘 오르던 산을 지금 저렇게 힘들어 하고 있으니…
난 앞서 가다 뒤돌아보며 기다려 주기를 반복하니 다른 등산객들과는 현저하게 뒤 떨어지기 시작 하였다. 그렇게 40여분을 올랐을까? 한고비 앞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가 온다. 받아보니 남편의 전화다. 자기는 혼자 천천히 쉬며 오르다가 정 힘들면 중간에서 그치려 하니 그냥 나 혼자 정상까지 올라가라 한다. 난 걱정이 되어 그럼 나도 안 오르겠다고 하니 아니란다. 언제 또 올지 모르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는 너무 아쉬우니 자기 걱정 말고 올라갔다 오라고 신신 당부한다. 하는 수 없이 조심하라는 말을 전하고 다른 등산객들의 틈에 끼어 제 속도를 내며 오르기 시작했다. 내 마음은 어느새 가벼워지면서 주위의 경관에 푹 빠져든다.
등산로 중간에 피어있는 보랏빛 산부추꽃이 힘든 나를 힘껏 북돋아 준다. 중간 중간 늘어서있는 산죽들은 고즈넉한 산길을 만들어 주며 스치는 바람에 제 몸을 비비며 사삭 사삭 정겨운 소리로 가을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가파른 길을 올라서면 곳곳에 기암괴석들은 제 몸을 자랑하듯 한층 위용을 뽐내며 우리를 맞이하고 그 우람한 바위위에 올라서니 저 아래 평야의 모습이 보인다. 아! 네모 반듯반듯한 들녘은 황금물결을 이루니 평화롭기 그지없다. 우리가 주차한 차들은 성냥갑보다도 작은 모습으로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한줄기 바람은 얼마나 시원한지…
산이 바위로 이루어져 앞 뒤 좌 우 봉우리마다 기암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다. 아기바위, 사자바위, 종봉, 천주봉, 관음봉, 선재봉, 대세봉, 석선봉, 등을 비롯하여 수 십 개의 기암괴석과 기봉이 꼭대기 부분에 비죽비죽 솟아 있는데 그 모습이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면류관 같다하여 천관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스카이라인이 온통 바위들이었다.
금강굴을 지난다. 겉모양이 금강산의 그 모습과 비슷하다. 이런 저런 이름을 붙인 바위들과 곳곳의 명소들은 참으로 절묘하다. 얼굴위로 땀이 비 오듯 흐르기를 얼마 만에 드디어 환희대에 도착하였다. 이 산에 오르는 자는 이곳에서 누구나 환희를 맛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과연 환희일까??? 지금까지 한 번도 외쳐보지 못한 야호 소리를 마구 질러보고 싶은 그런 감동이었다.
이산의 정상은 이곳 환희대가 아닌 저쪽의 연대봉이라 한다. 하지만 이곳이 정상처럼 여겨지면서 이곳에서 저쪽 연대봉까지의 능선을 따라 펼쳐진 억새의 물결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늘 아래 곧바로 억새들이 하늘로 날을 듯 춤을 추며 무언가 간절한 염원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난 내 키보다 훌쩍 커버린 억새사이의 미로를 정신없이 걸었다. 앞 사람이 보이지 않았고, 내 모습을 뒷사람이 볼 수 없었다. 오로지 나와 억새와 하늘이었다. 저 쪽 능선의 갈대들은 융단을 깔아 놓은 듯 질서 정연하다. 그런데 왜 억새들은 모두 한 방향으로만 향해 있을까? 누구의 지시를 받으며 저리 서 있는 것일까? 아니면 모두의 기원을 한 곳에 모아 하늘에 이르고자 함인가? 내 보잘것없는 염원도 저 사이에 끼워 놓고 싶다.
모두들 끼리끼리 앉아 점심을 먹느라 정신이 없는데 난 그저 마구 억새 사이를 정신없이 걸어 다녔다. 금방 미로를 헤매는 한 아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한참을 걷다가 억새들이 어우러진 한 쪽에 슬쩍 앉아 슬그머니 배낭에서 도시락을 꺼내었다. 이 풍경에서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여겨진다. 다시 몸을 돌려 억새를 등지고 앉아 본다.
반대편 산들의 기암괴석들이 한 눈에 들어오고 내 발 아래로는 잡목들이 어우러진 풍경이니 이제는 마음 놓고 밥을 먹어도 될 것 같아 한 입을 막 집어넣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무언가 보랏빛이 보인다. 아! 꽃이다! 나는 얼른 일어나 그곳으로 내려간다. 어머나! 진짜 꽃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용담이었다. 나는 그만 날을 듯 기뻤다. 억새도 좋았고 꽃도 정말 반가웠다. 그 옆에는 꽃 진 수리취가 아주 멋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나 혼자만 너무 행복감에 젖어 있는 것 같아 밑에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내려가야 하는데.. 일어나기가 싫다.
난 왔던 길로 다시 내려오기 시작 했는데, 7~8분 쯤 내려오니 너무나 아쉬웠다. 내 언제 이곳에 다시 올까? 이왕이면 걷지 않은 길을 걸으리라 생각하며 얼른 다시 몸을 돌려 다시 환희대로 올라간다. 그럴 때의 내 마음은 마구 설렌다. 무언가 모험을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다시 환희대에서 연대봉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는데 난 어찌할 수 없이 뿌듯하다. 오가며 스치는 사람 모두가 반갑고 정겨웠다. 흐린 안개로 저 아래의 바다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난 즐거웠다. 내려오는 길 곳곳에서 만나는 구절초의 외로운 모습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미역취의 노오란 빛은 세상에서 제일 환한 빛이었다.
오랜 가뭄으로 산길은 흙먼지를 날렸지만 가파른 경사길을 조심하느라 먼지라고 느끼지 못한 어려움 이었다. 내리막길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다리에 힘주어 걸었는지 종아리가 당기면서 한순간 풀려버린 다리 힘 때문에 한참을 앉아 쉬기도 하였다. 영월정에 도달하니 내 바지 가랑이는 온통 흙먼지로 뿌옇게 되었지만 그 먼지에게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심정의 정말 뜻 깊은 산행이었다. 남편은 산 아래 길가의 돌멩이 위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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