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으로!!

마음따라 발길따라

연꽃자리에 앉은 송광사

물소리~~^ 2014. 9. 17. 21:54

 

 

 

 

 

▲ 대웅전

한국전쟁 중 1951년에 불타 버린 후 1987년에 중창함.

아(亞) 자(字)형의 지붕이 독특하다.

대웅전 앞 마당에 석탑도 석등도 없이 썰렁하다.

연유는 이곳은 풍수지리적으로 연꽃의 화판에 해당하는 금계포란의 명당으로

무거운 돌을 놓으면 가라앉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송광사는 16국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승보사찰이다.

신라 말 혜린스님이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으며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대가람으로 부상하였다.

흥망성쇄가 반복되는 역사적 현실을 송광사 역시 피해가지 못했다.

정유재란,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소실되었다가

1969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계산을 오르내리며 흘린 땀으로 흠뻑 젖은 윗 옷을 바꾸어입고 송광사를 향해 걸었다.

송광사 입구에 조성된 상가단지가 참으로 넓다.

주차장 깊숙이 들어가 주차를 하고 상가에서 시원한 팥빙수를 먹었다.

웬일인지 송광사 경내에 들어가기 전 깔끔해지고 싶었고

점심을 대충 때운 허기진 마음을 보이기 싫었다.

 

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길은 고운 흙으로 다져졌으니 편안했지만 낯설음도 많았다.

예전의 모습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니 곳곳에 새로이 세워진 건물들이 있어서인가 보다.

쭉쭉 뻗어 올린 편백나무 숲 사이로 비켜든 햇살은

한낮의 사나움을 삭이며 비켜 내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지만 절로 고요해지는 길이다.

어느새 마음도 푸근해진다.

일주문을 지나니 저만치 우화각이 보인다.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신선이 되어 불가의 세계로 가는 의미의 전각이란다.

우화각을 받치고 있는 능허교의 깊은 뜻을 새겨보며 다리를 건넜다.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었다.

종고루를 지나니 웅장한 전각들이 나를 바라본다.

내게 짐 지워진 업이 너무 많다고 야단치는 것 같으니 주눅이 든다.

주눅 든 마음으로 경내를 돌아다니려니 조심스럽기만 하다.

파초 잎이 반가웠다. 파초 그늘 아래 오죽이 있었구나.

은목서의 꽃도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피었네? 배롱나무의 자태가 참 곱기도 하여라~

아, 저 대웅전 뒤로 예전에는 길게 오르는 계단이 있었는데 보이지 않네?

새로이 불사를 했을까?  지붕들이 많아 보인다.

 

 

▲ 송광사가 승보사찰임을 알리는 비

 

 

 

 

 

▲ 송광사 가는 길의 편백나무 숲

 

 

 

 

 

 

▲ 일주문

 

 

 

▲ 송광사 진입 공간의 美라고 극찬을 받는 능허교와 우화각

 

 

 

▲ 파초와 산사

 

 

 

▲ 오죽

 

 

 

▲ 비사리구시

나무로 만든 거대한 목조밥그릇

1724년 남원의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쓰러지자 이를 가져와 만들었다고 한다

쌀 7가마에 해당하는 약 4,000명의 밥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조선 영조 이후 송광사에서 국재를 모실 때

절을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 밥을 담아 두었다고 한다.

 

 

 

 

▲ 대웅전의 독특한 지붕 옆으로

스님들의 수행공간의 나란한 맞배지붕의 ㅅ자의 행렬이 참으로 정갈하다.

승보사찰임을 알려주듯 스님들의 수행공간이 대웅전보다도 윗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 절 마당을 지키는 배롱나무

 

 

 

▲ 은목서의 꽃이 마치 동자승 같다.

 

 

 

▲ 승보전

부처님이 아닌 스님을 모실때는 '전' 이란 현판을 붙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송광사에서는 '전' 이라 하였음은 이곳이 승보사찰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란다.

 

 

 

▲ 관음전

1903년 고종의 성수망육(51세)을 맞아 황실기도처로 건축한 건물로 성수전이라 하였는데

관음전을 해체하면서 관음전의 관세음보살상을 이곳으로 옮겨와서 관음전이라고 한다.

 

 

 

▲ 절집의 파초 그늘 아래에서

 

예로부터 절 마당에 파초가 심어져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함일까?

꽃말이 ‘탈속’ 이니 그에 걸맞음을 택한 것일까? 아니면

파초는 불에 타도 줄기와 잎이 다시 살아나는 특성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미일까?

키 큰 나무임에도 속재목이 없는 까닭에 텅 빈 의미를 차용하는 것일까?

어쩌면 알맹이 없이 겉으로만 위용을 자랑하는 허세의 어리석음을

파초를 통해 알려주고 싶음인지도 모르지만

파초는 절 마당에 있어야 어울린다.

한복의 선이 떨어지면서 느끼는 무게의 낭창함을 은연중 좋아하기에

낭창거리는 파초 잎의 자태가 고와서,

너울거림의 넉넉함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관심을 보낸다.

 

 

 

▲ 종고루

범종각이 아닌 종고루라 했음은

종과 함께 북이 있어서일까?

 

 

 

▲ 해우소

구조가 선암사의 뒤깐과 닮아 있다.

두 사람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고 있었으니...

 절과 한 공간인 것이다.

 

 

 

 

▲ 침계루

우화각의 윗쪽에 위치해 있다

누마루를 받쳐주는 기둥이 계곡 속에 들어 있으니

계곡를 베개 삼아 누웠다는 뜻으로 沈溪樓 라 불린다. 

 

 

 

▲ 임경당

우화각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거울같은 물가에 임해 있는 집이라서 臨鏡堂 이라 불린다.

 

 

옛 사람들은 무심한 자연의 현상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좋음을 끌어와  종교적 상징성으로 승화시키고 사유를 부여해 수행자의 화두를 끌어낸다.

자연 속에 숨어있는 道,

길(道)에 나서지 않으면 진정한 도(道)를 느낄 수 없기에

그 길을 따라 찾아와 마음을 승격시키는 의미는 모든 종교의 궁극점일 것이다.

 

 

▲ 세월각(왼편) 척주각(오른쪽)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송광사만의 독특한 건물

죽은자의 위패를 사찰에 모실 때

이곳에서 하룻밤을 모시며 혼백을 깨끗이 씻기는 곳이란다.

세월각은 여자의 혼백을 척주각은 남자의 혼백을 씻기는 곳이란다.

 

 

 

▲ 보조국사 지눌스님께서 불멸을 입증하기위해 심은 나무

보조국사가 다시 방문할 때 소생한다는 전설의 나무는 언제쯤 살아날까.

차츰 기우는 햇살 아래 아련함으로 물들어가는 내 마음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금방 벗어나는 마음이겠지만

이곳을 거니는 순간만큼이라도 겸손함을 주심에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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